[장로] 내 길의 한 줄기 빛 이만영 장로 (14)

Google+ LinkedIn Katalk +

믿음의 터전인 도림교회(5)
유병관 목사와의 만남
– 유병관 목사의 목회철학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신앙은 서로 사랑하는 신앙으로 전개되는데 특별히 없는 사람에게 더욱 관심을 쏟는 사랑의 신앙이었다. 이러한 사랑의 신앙은 서로 협동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사랑의 신앙의 힘을 통해 온전히 세워지는 공동체의 신앙은 바로 ‘난관’ 그 자리 한복판에서 창조되는 신앙이었다. 이는 단순하고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 위에 그 오랜 경륜으로 깊어진 믿음에 대한 그의 신학적 성찰이었다.
아울러 유병관 목사는 지역과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화 운동을 강조하였다. 복음화 운동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해서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가야 하는 방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복음 속에는 구원이 있다. 결국 이것이 교회 또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공통의 사명이었다.

아침기도회를 인도했다. 여호수아 6:15~20 “성을 돌면서 나팔을 불자”로 설교를 했다. 이는 복음을 전하라, 지역을 복음의 나팔로 점령하라는 의미이다. 복음만이 지역과 민족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화 운동은 자기 자신, 가족, 이웃, 지역, 직장, 전국에 미쳐야 한다.
-5월 16일, 25일 일기-
그리고 도림교회를 향한 유병관 목사의 유언과도 같은 가르침은 몸된 교회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야 하며, 서로서로를 위해야 한다. 그러한 마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는 남을 위해서 산다는 믿음의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이는 생활을 통한 믿음의 증거이자 교회를 통한 성도들의 삶이었다. 이것이 유병관 목사가 평생 견지해 온 십자가 신앙이요 십자가 복음이다.

몸된 교회를 설교했다. 첫째, 몸된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위한다. 둘째, 몸된 교회는 서로서로 위한다. 셋째, 몸된 교회는 남을 위해서 산다.
-10월 6일 일기-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이는 도림교회에서의 평생의 목회를 통해 정리된 유병관 목사의 목회 철학과 믿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병관 목사의 목회 현장에서 실천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생각들이 이만영 장로의 삶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목회자로서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장로의 입장에서 이러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모습에는 약간의 차이도 있다. 이는 도림교회를 통한 이만영 장로의 활동을 통해 나타난다.

도림교회의 시작과 약사
이만영 장로가 죽는 날까지 충성을 다해 섬기겠다고 다짐한 도림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그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가 평생 신앙의 터전으로 활동하고 섬겨온 도림교회와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될 수 있었던 원초적인 역사의 한 페이지인 것이다. 따라서 간단하게나마 도림교회의 역사를 살펴본다.

– 도림동과 영등포
영등포는 양화진, 당산나루, 노량진을 뱃길로 연결하는 서울의 배후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무와 배추 등을 재배하여 성 안으로 공급하는 곳이었으나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는 초기부터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분기하는 철도역을 만들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이곳이 대규모의 공업지대로 개발되면서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게 되었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와 한국전쟁으로 북한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영등포 공장지대로 모여들었으며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60년대 이후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공장지대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유입되었다. 이와 같이 영등포는 지방에서 유입된 사람들에 의해 하나의 산업도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도림교회 70년사’를 주로 참조하였다. 이는 지금의 도림동 지역이 급격하게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형성된 이 지역의 특징을 잘 설명해 준다. 즉 도림교회가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라는 정체성을 지니게 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1901년 8월 20일 일제의 경부철도주식회사는 한국 정부가 제공한 4만여 평의 부지 위에 세운 영등포역에서 경부선 철도 기공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철도 사업으로 말미암아 모랫말이라고 불리던 사촌리 일대는 크게 변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에는 조선의 모든 국유지와 공유지가 일제 소유가 되었고 많은 일본 사람들이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사들였다.
모랫말 주변은 요코오 다케도시라는 일본인이 차지했다. 총독부의 배경을 업고 고리대금으로 돈을 벌어 모랫말의 절대 권력자로 호화스런 생활을 하던 요코오는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의 저택이 있던 언덕은 지금의 도림교회 자리가 되었다. 도림교회가 위치해 있는 도림동 205번지는 본래 도야미리 478번지였다. 1914년 4월 27일 총독부 당국은 동, 리 통폐합을 실시하면서 시흥군의 상북면 사촌리와 도야미리, 원지목리의 일부를 합쳐 도림리로 칭했다.
이것이 지금의 도림동이다. ‘도림’이라는 말은 뒤쪽의 야산이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양에서 나온 도야미리를 지칭하는 구전의 변화를 통해 유래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시흥, 과천, 안산의 3개 군을 통합하여 시흥군으로 개편하고 군청 소재지를 영등포에 두었기 때문에 영등포 일대는 군청과 관련된 사람들이 다수 증가했다.
또한 일제는 초기부터 영등포를 공업지대로 개발하여 1911년에는 조선피혁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 군수품 제조 전문공장으로 활용되었다.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인 김성수는 전라도 지방 지주들을 중심으로 모은 민족자본을 가지고 영등포역 앞에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하여 한국인들의 옷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정봉덕 장로(염천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