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66)

Google+ LinkedIn Katalk +

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45)

배위량 탐구와 연구를 위한 길 위에서의 변명(辨明)과 회오(悔悟) <2>

벌써 필자가 배위량의 흔적을 탐구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를 시도한지 5년이 지났다. 이제는 교수직을 정년 은퇴한 자의 신분으로서 배위량에 대한 탐구와 연구를 시작한지 벌써 5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서 그 길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 같다. 뒤돌아 바라보니 흔적은 아직도 희미한데, 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아래의 생각들은 배위량을 탐구하는 길 위에서 느끼는 회오이며 아울러 필자의 변명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변명과 회오도 필연적인 요소일 것 같아 적어 본다.

1. 성서학자가 교회 역사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
2. 언제까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가?
3.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성서학자가 교회 역사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

이 문제제기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할 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보았던 텔레비전 프로에서 시골 마을을 찾아가 어느 방송 기자가 시골 할머니들을 취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연세드신 그 할머니들이 시골 마을을 지키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 그런 프로였다. 그때 그 프로에 나온 할머니들이 하나같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바쁘다’는 말씀을 하셨다. 시간은 언제나 인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많다. 그런데 시간이 인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이 인간의 삶의 현장이다. 해야 할 그 일들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아니면 못하는 일을 중심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때로는 그 일이 매개가 되어 건강도 유지하고 그 일이 삶을 유지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일이 없는 인간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퇴직한 후 “이제 퇴직하니 편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일이 없어 힘들어 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어떤 형태의 일이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6.26전쟁 후에 태어난 필자와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이젠 사회 각계각층에서 퇴직하는 시기를 맞았다. 활발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다가 갑자기 일이 없어 적응하지 못하는 어떤 이는 심각한 공황장애를 겪는 사실이 전해지기도 한다. 어떤 젊은이는 너무 세상 일이 급격하게 변해가는데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며 살아가는 데서 힘겨워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에서건 인간 세대는 늘 이러한 모습을 경험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는 노력하지만, 여전히 이런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힘든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어떨 때는 말없이 걷기도 한다. 어떨 때는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삶이 고되지만,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찾을 때 보람있는 삶을 살게 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사람들이 그런 길을 걷길 희망한다. 누구나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그 길이 그 당사자에게는 힘들고 어렵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어느 정도의 차이이지 모든 사람에게 다 버겁다. 그 사실을 인식한다면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는 길에서 좀 더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인간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슬프고 외롭고 힘들고 어려운 것이 인간의 길이다. 그런데 그런 고뇌의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문제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것 같다.
성경은 인간을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에 비유한다. 질그릇은 깨어지기 쉽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질그릇 같은 인생살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인생을 가치있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필자는 2015년 여름 사막과 같은 뜨거운 스페인 길을 걸으면서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고된 삶이라고들 하지만, 인간은 때때로 시간시간마다 힘들고 벅차고 어려울 때도 있다. 필자에게 그런 길을 걷도록 하신 이도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왜 그런 길을 걷도록 이끄셨을까 생각한다. 그때까지 필자는 성서학자로서 외길 인생을 살았다. 성서학자로서 살아가는 것만도 버겁다. 해야 할 일을 여럿 계획하고 그것을 지금껏 해온다. 그런데 산티아고 길을 걷고 난 후 생각의 구조가 많이 바뀌었다.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찾게 되고 그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에 산티아고 길과 같은 길을 찾고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을 필자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가 없다. 각계각층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 ‘길위의 학술대회’를 하면서 주로 역사학자들을 초청하여 논문을 발표하도록 부탁했다. 그런데 배위량의 글을 텍스트 중심으로 비교하고 연구하는 일에 성서학자의 시각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문의 길에서 어떤 사실에 맞는 텍스트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떤 사실을 담고 있는 텍스트가 여럿이라면 어느 텍스트를 택하느냐에 따라 반대의 견해로 결정되어야 할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는 텍스트는 이렇게 말하는데, 그 텍스트이 존재를 모르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연구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에세네파(Essene)에 대한 언급이 신약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그리스어: , Philo) 그리고 플리니(Plinius)의 글에 에세네파에 관한 언급이 나타난다. 3인의 저술에 나타나는 에세네인들의 모습이 중요한 내용에서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에세네일들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채 신비한 집단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 중에 1946/47년에 쿰란의 발굴과 아울러 그곳에 존재한 많은 문서들을 통하여 에세네인들의 실체가 밝혀졌다.
배위량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그의 글을 읽고 그 글을 실제로 그가 걸은 길에 대조하고 비교하면서 그가 남긴 길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찾는 일은 아직까지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여러 분야의 학자, 목회자, 신학생, 청년들과 신자들이 각기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일을 이루는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필자는 필자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함께 참여하는 길을 찾고 서로 함께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지만, 아직까지 체계도 없고 하여 그 관심을 엮어 체계화 시키는 데 많은 시간과 물질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어쩌면 필자에게 그것이 필생의 과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젠 좀 쉬면서 슬슬 해도 되면 좋겠다. 그런데 그럴 환경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배재욱 교수<영남신학대학교>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