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광야 같은 시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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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0월 10일 제대하고 집에 돌아오니 창공을 나는 새처럼 마냥 자유롭고 기쁠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야만 마음의 안정을 얻는 존재인 것 같다.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우리를 뛰쳐나오기는 했는데 갈 곳이 없으니 불안하고 허전했다. 취직할 시기도 아니었지만 받아주는 곳도 없었다. 

어느 직장이고 벌써 대학 졸업자가 넘쳐서 4년제 대학 졸업자가 아니면 이력서도 낼 수 없는 때가 되어 있었다. 둘째 동생은 육사에 가 있었고 셋째는 광주 사범 2학년, 넷째는 광주 서중학교 2학년으로 둘 다 광주로 집에서 기치 통학을 하고 있었으며 마지막 두 여동생은 임곡(林谷)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그때 평생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계셨던 때였다. 당시 우리는 아버지가 부임해 계셨던 임곡초등학교의 교장 관사에서 다 같이 살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먼 도서지방에서 귀양살이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학교의 교사 한 사람이 교내 등사판을 이용해 불온문서를 등사하여서 뿌린 것이 발각되어 감독 불찰로 징계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머니 집에서 애들과 함께 더부살이하고 있었다. 다행히 고모들은 다 출가했고 막내아들만 함께 사는 때였다. 거기다 나까지 제대해서 놀고 앉아서 아버지의 짐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광주로 나와 입대 전 가정교사로 있던 양림동 집을 들렀다. 애들이 커서 이제는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 집에서 다시 가정교사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숙식뿐이었다. 그 집에서 애들을 돌봐 주는 것은 아침 7시부터 조식 때까지, 오후 4시부터 석식(夕食) 때까지, 그리고 석식 후 오후 8시 애들이 잠들 때까지였다. 조식 후 오전 한동안이 비는데 딱히 아르바이트할 곳이 없었다. 용돈이 없으면 담배를 끊고 외출하지 않고 집안에 박혀 있는 일이었다. 이웃에 주인아주머니의 동서가 되는 분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분을 ‘준이 어머니’라고 불렀는데 그 집에 초등학교 3학년짜리 학생이 하나 있었다. 내가 공부를 가르치는 김에 자기 아들도 봐 달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 그 애는 공부를 썩 잘하는 애이기도 했다. 그분이 가끔 나에게 용돈을 찔러주었다. 남편이 의대 학생이었는데 국대안(國大案;국립대학을 세우는 일) 반대로 데모를 하더니 월북해버려 홀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사는 분이었다. 

그러던 하루, 원(媛; 지금의 내 아내)이 광주에 나타났다. 무등산 마루의 행복원(幸福院)에 어린애를 돌보러 왔다는 것이었다. 보육원 원장과 이야기가 되었다고 했다. 만나본 원장은 약간 우락부락한 인상을 줄 만치 생김새가 부분마다 표준보다는 얼마씩 살이 더 붙어 있는 그런 분이었다. 그는 원이 와서 해야 할 역할부터 설명했다. 

“처음엔 젖먹이를 좀 맡아 주었으면 했는데 도망하실 것만 같아서 …, 어떻든 걔들 방은 똥 천지라니까요. 그래 처음은 학교에 다니는 반을 좀 맡아 주세요. 익숙해 지면 차츰 어려운 일을 좀 맡아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는 한 보모를 불러 모든 것을 설명해 주라고 일렀다. 

나는 행복원을 나오며 감기 기운이 있어 죽을 먹은 탓이라고 해말쑥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를 거기에 남겨두고 온 것이 정말 잘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원은 이 길 밖에는 나를 만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는 목포에 계셨고 언니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광주에는 여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 몇 있었지만, 친구 만나러 광주 간다고 나올 처지가 못 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어떤 고생도 내 곁에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나를 안심시키며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그런지 일주일 만에 행복원에서 전화가 왔다. 원이 매우 아프다는 것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오승재 장로 <seungjaeo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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