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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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결혼을 피하는 남녀가 많아 자녀가 결혼만 하겠다면 부모는 대환영이며 호화로운 예식도 마다하지 않는다. 코로나19 전에는 예식장은 호황을 누렸으며 예약이 힘들었고 40분 간격으로 식장 주인은 결혼식을 해치우느라 땀을 뺐다. 

나는 1959년 1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어떻게 된 행운인지 당선되어 상금이 나왔다. 꿈에도 생각하기 어려운 관문이었다. 다른 애 같으면 그 돈을 털어 친구들을 불러 술 파티를 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상금으로 반지를 하나 사고 나머지는 둘이서 살만한 집을 구하는데 보태어 몸이 약한 신부를 빨리 데려와야 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일에 나는 결혼하였다. 4년 전 쌍팔년(단기 4288년)1) 이날은 이 대통령 80주년 생일이었다. 그때부터 이날은 임시공휴일이었다. 비가 자주 오더니 내가 결혼하는 날은 날씨가 화창하고 벚꽃이 만발하였다. 예식장은 광주 YMCA로 했고 피로연은 가까운 ‘운청장’으로 정하였다. 우리 집도 처가도 전혀 인연이 없는 곳이었다. 오후 2시 예식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각이었는데 식장에 신부가 도착하지 않았다. 당시 예식장에는 신부 분장실이나 대기실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내 신부는 외부 미장원에서 단장하고 예식장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1, 2분도 아니고 무려 40분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주례자나 하객들이 그렇게 오래 예식장에서 기다려 줄 리도 없고 또 예식장에서는 다음 차례 때문에 우리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태에서도 나는 느긋한 예식장과 대단한 인내심으로 기다려 주신 하객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했다. 결혼 후 우리는 그것 때문에 싸울 뻔했는데 신부는 신부 대로 화가 나 있었다. 화동(花童)이 나타나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리느라 자기도 화가 났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 책임이었고 또 내가 부탁한 내 친구 책임이기도 했다. 

드디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식순에 따라 축사 순서가 있었는데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당연히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청첩장의 순서지를 보고 준비해 올 줄 알고 부탁하지도 않았었다. 어렵사리 결혼식은 끝났다. 우리는 서로 쌍방에 대한 오해를 못 풀고 화가 난 채. 처가 식구들은 다 서울로 군산으로 떠나고, 우리 가족은 몽땅 내가 신혼부부 집으로 계약해 준비해 놓은 광주 학동(鶴洞)의 전셋집으로 왔다. 그 집은 세를 놓으려고 문간 채에 새로 지은 집으로 중간에 부엌이 있고 양편으로 온돌이 있는 두 칸짜리 방이 있는 곳이었다. 아내는 그 후로도 두고두고 안목이 있는 남자가 이런 곳을 신혼부부 거처로 얻을 수 있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안 갔을 뿐 아니라 호텔에서 첫날 밤도 보내지 못했다. 부모님과 두 남동생이 한쪽 방, 나와 초등학교의 두 여동생이 한 방을 차지하고 우리는 거기서 첫날 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때가 우리 가족 빈곤의 막바지, 아래로 오목한 포물선의 정점(頂点)에 있었다. 그때부터는 상승할 일만 남아 있다고 자위했다. 부친은 도서 지방의 유배 생활에서 상륙하여 광주 근교는 아니지만, 시골 초등학교 교장 관사로 옮겨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고, 셋째 동생은 사범학교를 졸업해서 이제 취직하면 홀로 설 것이었다. 앞으로는 광주일고에 진학한 넷째 동생만 돌보면 되었다. 나도 결혼했으니 부모님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우리도 부부가 함께 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내는 불평하지 않았다. 신혼여행은 앞으로 얼마든지 갈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새 학기부터 강사가 아닌 정규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아내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물을 데워 내 발을 씻어 주었고 시장에 나가 아껴서 산 음식으로 나를 감동하게 하였다.

1) 단기(단군기원)의 연호는 1948년부터 써 오다가 1962년 1월 1일부터 서기 연호를 쓰기 시작함.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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