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4.19학생정신으로 나라 바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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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신축년에 4.19혁명 61주년을 맞게 된다.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 필자도 ‘부정선거 다시 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연세의 사자물결 속에서 서울 거리를 뛰었다. 점심도 굶은 채 신촌 학교 교정에서 구호를 외치며 중앙청 앞까지 시위해 오는데 배창자가 등에 붙는 듯 했다. 감회가 깊다.
4.19 대대적인 반정부 학생시위가 왜 일어났을까. 그 까닭을 순차적으로 살펴보자. 1945년 8.15 광복을 맞으며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했다. 복잡한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단독정부 건국에 성공했다. 반공반일을 국시로 정한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 울타리를 위해 마땅치는 않으나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시켰다. 반민특위까지 해체했다.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나라체제를 세웠으나 안보 준비가 허술하여 김일성 북한군 남침기습에 밀려 전선도 낙동강까지 밀리고 수도 또한 부산으로 옮겼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2대 직선 대통령이 되었다. 환도 후 서울에서 1954년 11월 27일 사사오입개헌안을 자유당이 무리하게 통과시켜 이승만은 종신 대통령 길을 터놓았다. 그리하여 1956년도 3대 대통령 후보가 되고 부통령 후보는 이기붕 국회의장이었다. 민주당은 해공 신익회, 운암 장면이 정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못 살겠다 갈아 보자” 선거구호로 맞섰으나 그해 5월 5일 호남 선거유세차 가던 해공이 급서하여 5월 15일 선거에서 이승만이 3선 대통령이 되고 부통령은 국민이 야당 민주당의 장면을 뽑아 주었다. 해공이 호남 유세 도중에 급서 없이 살았다면 그때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해공 추모표가 20% 나왔던 것이다. 장면은 암살 위기까지 당하는 푸대접을 받았다.

이승만의 집권 노욕은 대통령 4선에도 도전했다. 보안법 파동(1958), 경향신문 폐간(1959) 등의 독재 정치를 이룬 자유당은 4대 정부통령 후보로 이승만 이기붕을 추대했다. 민주당은 조병옥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뽑았으며 ‘죽나사나 결판내자’ 선거구호로 맞서 싸웠다. 유석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 신병 치료차 건너 간 사이 최인규 내무장관은 야당이 5월 선거를 요구했으나 두 달 앞당겨 3월 15일로 못박았다. 미국에서 충격받은 유석은 2월 15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별세했다. 이승만에게 과잉 충성하는 최인규 내무장관은 투표함에 자유당 투표지를 미리 4할을 넣어 두고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등 사전에 관권부정투표 준비를 철저히 해 두었다. 예정대로 3.15 부정선거를 실시하고 3월 17일 대통령 이승만 87.7%,부통령 이기붕 79%로 정부통령 당선자를 발표했다. 국민은 믿지 않았다.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 학생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외치는 시위를 했다. 경찰 총에 사망 학생이 나왔다. 연행 구속된 학생은 공산당 사주를 받은 불온학생 취급을 했다. 그런 가운데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군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체로 떠오른 것이다. 온 국민이 천인공노할 일로 분개했다.

이에 분노한 고대생 3천여명이 4월 18일 ‘민주역적 몰아내자’, ‘마산사건 책임자 즉시 처단하자’ 구호를 외치며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시위해 갔다. 고대생이 안암동 학교로 오는 길에 종로3가쯤에서 동대문 자유당 정치 깡패들의 무자비한 습격을 받았다. 이를 본 국민의 분노가 치솟았다. 다음날 4월 19일 피의 화요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초·중·고교 대학생,일반 시민까지 총궐기하여 반정부시위가 극에 달했다. 전국에서 186명의 학생이 희생되었다.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교수단이 시가행진에 나섰다. 교수단 시위와 미국의 하야 압력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했다.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살린 승리였다. 민권 국민의 승리였다. 28일 경무대 제2인자 이기붕 가족은 집단 자살했다. 이승만은 4월 29일 하외이로 망명했다. 학생의 힘으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 정부는 무능하여 8개월만에 5.16 군사구데타로 무너졌다. 군사정부는 4.19혁명을 4.19의거로 낮게 보고 단순기념일로 기념식을 했다. 문민정부에 와서 4.19혁명으로 부르고 우이동 4.19묘지가 성역화되었다. 정의 자유 민주 진리의 4.19정신은 헌법전문에 3.1정신과 함께 길이 가야 할 것이다. 거짓 많은 오늘의 우리 정치가 순수했던 학생들이 이뤄낸 4.19정신을 잘 받들어 정의 자유 진리 민주사상으로 나라를 튼튼히 세워 나가고 남북 평화통일도 이뤄 가야 할 것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장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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