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믿음의 정의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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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FAITH)을 ‘Forsake All I Take Him(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그리스도>만 갖는 것’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마치 결혼이 많은 이성(異性)들에게 조금씩 받던 호의(好意)를 다 포기하고 한 사람에게 전부를 주고 전부를 받는 집중적선택과 관계맺음이듯이 말이다.

이재철(李在哲) 목사님은 신앙인교육 「성숙자반」에서 ‘믿음’의 대체어(in another words)를 제시했다. 추상명사인 ‘믿음’을 보통명사들로 구체화시킴으로 공중에 뜬 비행선 같던 ‘믿음’을 지상을 굴러가는 자동차나 자전거처럼 손에 잡히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은것이다.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①번제물 드림. ②천마리 양과 다량의 기름 드림. ③맏아들 인신공양 등으로 오해하니까 하나님께서 구체화시켜 ①의를 행하고 ②인자를 사랑하며 ③하나님과의 겸손한 동행(미 6:6-8)이라 하신것과 비슷하다.

믿음의 대체어를 소개한다. ①믿음은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다. 즉 하나님을 알고 자기자신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나는 피조물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고후 4:7/고후 4:8-9/고후 12:9/마 3:15). ②믿음은 ‘거룩한 부담’이다. 예레미아는 그렇게 살면 망한다고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고 오히려 핍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러주지 않을 수 없는 부담(소명)을 느꼈다. 바울은 쉬어도 되지만 일했다(고전 9:6/고전 9;16).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게 아니다. 내적동기로 자가발전은 하는 것이다. ③믿음은 ‘약속어음’이다(행 7:4-5). 아브라함은 노경에 자손 약속을 받았지만 현실화하는데 25년을 기다렸다.

다윗도 사무엘의 피택안수를 받았지만(삼상 16:7) 실제 왕이 되기까지 숱한 시련과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어음을 현금화하는 데는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 ④믿음은 ‘기다림’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현금화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봄에 파종한 사람은 성급해도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대추나무 감나무는 몇 년을 기다려야 열매를 얻는다. 우물에 가서 숭늉을 찾아선 안된다(시 66:10-12/합 2:3). ⑤믿음은 ‘자기확장’ 또는 ‘자기성장’이다(고전 13:11). 예수 탄생 때 페르샤의 천문학자들은 별의 징조를 보고도 예수께 경배했지만 가장 근거리에 있던 헤롯은 서기관들의 증언(미 5:2)을 듣고도 경배는커녕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별이나 꿈을 통해서 하나님과 통하는게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통찰력과 분별력이 생긴다.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는 충고가 있다. 결혼을 위해 배우자의 용모, 학벌, 직업 등 맞춤식 기도를 권하는데 때로는 위험할 수 있다. 상대의 외적조건에 매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나의 기도에 맞추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주문식 식단일 수 없다. ⑥믿음은 ‘선택’이다. 삶의 순간마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봄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씨앗은 내가 뿌려야 한다(갈 1:10/요 21:1-9). 요한복음 21장에는 4복음서의 결론이 들어 있다. AD 25년 갈릴리호수 옆에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새 수도를 건설하고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라고 불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계속 ‘갈릴리호수’라고 불렀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수도원이나 변화산이 아니라 세상권력의 영향 아래에 있는 ‘황제의 호수’일 때가 많다. 우리는 ‘갈릴리’냐 ‘디베랴’냐를 선택해야 한다. ⑦믿음은 ‘계산’이다(마 5:19). 하나님의 정의는 평등(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공평’이요. 공평은 ‘뿌린대로 거두는 것’(種豆得豆)이다. 하나님 나라엔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마 6:11/미 20:26-27). 심지 않고 거두려는 자나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는 자들이 사기꾼이고 방해꾼이다.

하나님 세계에선 받는 것보다 더 일하는 일꾼이거나 최소한도 품삯만큼이라도 일하는 삯꾼 정도는 돼야 한다. ⑧믿음은 모험이다(창 6:22). 노아는 하나님 지시에 따라 방주를 만들었다. 길이 137.4m, 너비 22.9m, 높이 13.7m의 큰배를 조선(造船)경비도 안 준 채 지으라고 했다. 그것도 산 정상에다가. 비상식이지만 모험적 순종을 했다. 따지고 계산하지 않았다. ⑨믿음은 ‘초지일관’이다(사 26:3). 수미일관(首尾一貫)이라고도 한다. 처음 마음 그대로 가는 것이다. 남도 나와 같이, 속도 겉과 같이 나중도 처음 같이 사는 것이 믿음이다. 용두사미는 믿음이 아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끝까지 소걸음으로 가는 것이다. ⑩믿음은 ‘본’이 되는 것이다(sample/見本). 모든 사람은 누구에겐가의 교사가 된다. 眞面敎師냐 反面敎師냐만 남아있다. 베스도 총독 앞에서 바울이 체험한 주님을 증거하니 그는 바울을 미쳤다고 했다(행 26:24-29/고전 11:1, 고전 10:33). “바보는 바보이기 때문에 바보 아닌 사람을 바보라 한다. 바보 아닌 사람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바보를 바보라 한다! 결국 다 바보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보와 바보 아닌 사람을 분별하신다. 그것이 심판이다(종말론).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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