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이별의 아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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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학으로 편입하기로 하고 기전여중·고교에는 사의를 표했다. 학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1963년 1월 15일 먼저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아버님이 계신 시골 학교로 아내를 보내기로 했다. 그날은 눈이 유난히 많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나는 새벽 2시 30분에 눈을 떴다. 새벽 5시 55분의 차를 타기 위해 간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것은 이삿짐을 다 보내버리고 남겨 둔 얇은 세 장의 담요 때문만은 아니었다. 뜨내기처럼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법으로 전주에 와서 또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새 생활을 시작하려고 서로 헤어지는 시간이 너무 빠르고 급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마지막 송별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찬송을 불러 주었다. 그때 아내는 눈이 붓도록 울었다. 평생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연년생으로 낳은 세 어린애, 특히 한 달도 채 안 되는 핏덩이 같은 어린애를 안고 떠날 때, 하나님께서 ‘간 데마다 보호하시며, 위태한 일 면케 해주신다’라고 불러 준 찬송이 마음에 사무쳤기 때문이었다. 4시에 일어나 전주에서의 마지막 가정예배를 드렸다. 나는 이곳에 와서 억지로 기독교인으로 연단된 것을 감사하였고 아내는 소원이던 예수병원에서, 그것도 내 친구까지 있는 곳에서 선물로 주신 3남매를 안고 떠나게 된 것을 감사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또 광야로 내모시는데 오!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였다. 나는 잠들어 있는 어린애들을 내려다보았다. 큰딸은 어머님을 따라 미리 내려가 있었고 두 아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순간 나는 악인 같고 아내는 천사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 의지는 항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는데 아내는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암소처럼 순종의 길을 걷는 것 같아 가슴이 저리었다. 정신없이 전주에 와서 이제 막 정착하고 사려나 했더니 또 예상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나는 학교 일에 바빴고 아내는 애들을 출산하고 기르는데 정신이 없어 어떻게 살았는지 설명하기도 어렵다. 

드디어 우리는 애들을 나누어 안고 역까지 걸었다. “이 시련을 우리는 이겨내야 해. 오! 양 같은 아내를 도우소서. 얘들아,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는 강하게 살아야 해. 결코, 헛되지 않은 열매를 맺을 거야.” 나는 둘째 아들을 안고 가면서 눈보라 속에서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빴던 전주에서의 우리들의 삼 년은 이처럼 끝났다. 

나는 아내를 보내고 하숙방으로 돌아와 뜬 눈으로 보낸 뒤 다음 날 편지를 썼다. 

1963년 1월 16일

<세상을 온통 흰 눈으로 뒤덮고 당신을 그곳으로 내모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빙자한 내 사사로운 욕심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자책하기도 합니다. 광야로 가는 것은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이지만 내가 가는 곳은 내가 기뻐서 택했고 당신이 가는 곳은 순수하게 순종의 길이라고 생각할 때 괴롭습니다. 그러나 어제 그 눈이 우리의 장래를 축복하는 서설이기를 빕니다. 송정리에서는 애들과 짐들을 가지고 어떻게 내렸는지 또 거기서 아버지가 계시는 시골 학교까지는 어떻게 갈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을 떠나보낸 그 날 나는 아주 따뜻한 봄날이 찾아온 것을 꿈에 보았습니다. 노란 개나리들도 길가에 활짝 피어 있었는데 나는 당신을 하루만 기다리게 했어도 이렇게 따뜻한 날 갈 수 있게 했을 것을… 하고 가슴 아파하다가 눈을 떴습니다. 꿈에서 깨어 하숙방에 덜렁 혼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2월에 있을 졸업식, 중·고교 입학시험 등이 끝나면 15일쯤 퇴임 인사를 하고 2월 18일에 편입 시험을 보기 위해 대전에 가겠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사는 생활이 어렵겠지만 힘내서 이겨내십시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리라 믿습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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