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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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71)

구미에서 상주까지 (19)

정황상으로 볼 때 1893년 4월 26일에 해평을 출발한 배위량은 바로 그날 선산을 방문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부 중에 한 명이 병들어 평소보다도 짧은 길을 걸어 낙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낙동으로 선산 읍내까지 20km 정도이며 왕복 40km 정도 되니 선산으로 갔다가 낙동까지 돌아온다면 10시간 정도의 길을 걸어야만 다녀올 수 있는 먼 길이다.
그런데 배위량의 제2회 순회전도여행단과 함께 활동한 마부 중의 한 명이 병들어 4월 26일에는 겨우 50리밖에 여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배위량이 그 날 선산을 방문했다면, 낙동에서 선산까지 5시간 정도를 걸어 선산으로 갔다가 다시 선산에서 낙동까지 5시간을 걸어 낙동으로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 낙동-> 선산-> 낙동으로 왕래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건이 도저히 성립되기 어렵다.
이상규가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에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저녁에 낙동에서 쓴 아래의 글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필자는 이리저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무수한 고민을 하면서 배위량의 일기 속에서 답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 후 배위량의 일기를 다시 읽게 되었다. 아래와 같은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을 찾게 되었다.

우리는 선산 읍내를 지나 왼쪽 방행으로 갔고, 강을 건넜다. 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김천(Kim San)은 이곳에서 80리나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성주 쪽으로 흐르는 강의 서쪽지역에 속한 곳이다.

We passed Syunsan Umnai to our left today – across the river. Seoul road crosses to the west side of the Aak Tong at this place. Heard that Kim San is away down eighty li from here on the west side of river toward Sung Joo.

위에서 여러 번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여행에 대한 글을 이상규가 번역한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와 탁지일이 번역한 을 대조하면서 일기를 분석했다. 탁지일은 <Baird, Richard H.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했고 이상규는 미국에서 수기로 된 배위량의 일기를 발견하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출판으로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 2>로 출판했다. 그런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출판으로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 2>에 적시되는 배위량의 일기에 “Seoul road crosses to the west side of the Aak Tong at this place.”(“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글에서 “Seoul road crosses”(“서울로 가는 길”)을 유의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은 한국의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뒤인 1946년 8월 15일 일제에 의해 불렸던 경성이란 이름의 도시가 서울로 불리게 되었는데, 서울이란 명사는 어느 도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신라 때부터 사용된 일반명사로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정치권에서 한 때 수도를 세종으로 옮기자는 열풍이 불었는데, 민족 정서상으로 볼 때 수도를 옮기게 되면 ‘세종시’가 ‘서울시’가 되어야 하고 ‘서울시’는 ‘한양시’(고려시대 지명)나, ‘한성시’(조선시대 지명)가 되어야 마땅하다. ‘서울’은 옛 신라말인 서라벌에서 온 말로 ‘새로운 마을’(新邑) 혹은 ‘새로운 도시’를 뜻하는 우리 고유의 민족성이 깃든 말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에 의하여 한양 또는 한성으로 불리던 도시를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배위량이 약 53년 4개월 전에 앞으로 불려질 서울이란 이름을 예측하고 ‘Seoul’(‘서울’)로 적었을까에 대하여 심히 고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이상규가 미국에서 ‘손으로 쓰여진 배위량의 일기’를 발견한 후 그것을 복사하여 한국으로 가져와서 번역한 일기는 1946년 8월 15일 이후에 배위량의 원래 일기를 바탕으로 어떤 사람이 배위량 사후에 필사한 것이 분명하다”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배위량이 예언자나 미래를 예지하는 사람이기에 그는 약 53년 4개월 전에 앞으로 이루어질 한국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고 ‘한성’이 앞으로는 ‘서울’로 불리게 될 것이므로 생각하여 그렇게 적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배위량은 그런 예지의 능력을 가졌다기 보다는 당시 한국의 상황이 매우 어려움을 간파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국에 복음을 심어주기 위해 애쓴 복음전도자이다. 그래서 배위량은 아래와 같은 말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다.

서전도사가 애처로워 보인다. 그는 며칠 전에 조선이 일본과 중국의 속국이 되어간다며 애통해하면서, 오늘날 이 백성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그는 마음아파 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듣거나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도록 주입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백성들이다. 이들은 다른 언어는 전혀 모른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소망할 뿐이다.

“Poor Mr. Saw!”(“불쌍한 서씨”) 또는 “Poor I4r – Suhl”(“서전도사가 애처로워 보인다.”)라고 표현하는 문장에 등장하는 서 전도사는 서경조이다. 서경조는 1907년 독로회(獨老會)에서 길선주(吉善宙) 그리고 이기풍(李基豊) 목사와 함께 최초의 목사로 안수받은 7명의 목사 중의 한 명인 서경조(徐景祚) 목사이다. 위의 글을 보면 배위량은 한성이 앞으로 서울로 불려질 것을 예언한 예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서경조를 애처롭게 보았고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국의 복음 전파에 열중했던 인물이다.
이상과 같은 짧은 글로 미루어 볼 때 배위량이 1893년 4월 26일에 선산을 방문했다고 기록한 일기는 후일에 어떤 사람이 배위량의 원본 일기를 다시 손글로 쓰면서 원본 일기를 대본으로 하여 설명하고 추가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배위량의 2가지 일기의 매우 다른 부분을 설명할 길이 없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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