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수상] 가화만사성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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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공경하면 복을 받는다고 성경에 나와 있어. 네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잘되고 생명이 길겠다고 하셨거든.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해서 복을 받든지 말든지 그건 너희들 몫이다.” 지금은 어엿한 회사의 중역으로 나를 도와 일하고 있는 두 자녀에게 늘 했던 말이다. 자녀를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하는 것은 의무이자 책임이기도 했기에 말씀을 가르치며 키우도록 애썼다. 가화만사성.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 중 하나다. 가정이 편해야 만사가 편하다는 말을 옛 선현들은 왜 그렇게 강조했을까 했지만 가정을 이루어 살다 보니 가정이 편안하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알 수 있다.
강원도 태맥에서 살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복닥거렸다. 사람 좋으신 아버지는 싫은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성실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성품도 말투도 강한 분이었다. 우리 형제들을 향한 어머니의 심부름이 정점(?)을 찍었을 때 어머니는 왜 부드럽고 온유한 어머니들과 다를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사춘기가 좀 심하게 왔을 때는 팥쥐 엄마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어머니와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사실상 독립이나 마찬가지였던 터라 훗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게 된 이후에야 진지하게 만날 기회가 생겼다. 어머니, 아버지의 성품은 여전하셨다. 물론 예전에 비해 연세가 드셔서 기세가 많이 꺾이셨지만 윗사람으로서의 위엄과 원칙은 고수하셨으므로 가정의 위엄이랄까 그런 게 갖춰져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결혼시키면서 특별한 조건 같은 것을 붙이지 않으셨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 아껴주고 잘 살면 된다는 주의셨는데, 딱 하나 원하셨던 것이 있었다. 자식들이 출가할 때 부모님과 함께 살 시간을 갖는 것이다.

새사람을 집안에 들이는 과정에서 가족을 소개하는 일은 행사와도 같았다. 아홉 형제와 그의 짝, 자녀들에 이르기까지 대가족이 모인 가운데 이름 맞히기가 시작된다. 그나마 우리 집사람의 경우 내가 둘째라 동생들이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배우자까지는 없었지만, 동생들의 경우는그 많은 가족의 이름을 다 외우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아내와 결혼한 뒤 우리도 부모님과 2년을 함께 살았다. 사내대장부 같은 어머니의 지휘 아래 시집살이를 하느라 아내도 고생 좀 했지만 어머니는 상당히 상식선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셨고 오히려 맺고 끊음이 분명했기에 함께 살 때 불편함이 없었다. 생활비 면에서도 철저하셨고 자녀들에게 다시 베푸실 때도 지혜롭게 하셨다. 특히 우리 가정은 부모님과의 애틋한 정이 더욱 깊다. 사업이 부도나서 회사와 집 모두 압류당했을 때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우리 가족이 의탁한 곳도 부모님 댁이었다. 무엇보다 신앙인으로 거듭나 재기할 때도 아들의 이야기에 끝가지 귀기울여주셨다. 부모님은 예전부터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리시곤 하셨는데, 회심한 아들이 교회에 나가자는 말씀을 드리자 단 한 번에 승낙하셨다. 그렇게 부모님은 나의 전도 대상 1호가 되어주셨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형제들 사이에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세워져 있었고 그것을 지키려고 다 같이 노력했다. 누구 한 사람 모난 구석도 없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이 모두 동등하게 공평하게 부모 모시기에서부터 신앙인이 되는 일까지 하나로 이어졌던 것 같다.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위계질서는 확실했다. 어렸을 때도 큰형님부터 막내에 이르기까지 위계가 확실한 가족이었기에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강국창 장로
• 동국성신(주) 대표이사
• 가나안전자정밀(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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