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李陸史(264)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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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1904-1944)는 윤동주와 함께 일제 말기 2대 민족시인 중 한 사람이다. 안동 출신으로 본명은 원록(源綠) 원삼(源三)이다. 북경 군관학교를 거쳐 북경대학 사회학과 졸업생이다. 21세때 형(源基), 동생(源裕)과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했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형제들과 함께 3년간의 옥고를 치렀을 때 수인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이육사(264)라 불렀다. 

이후 대소사건이 있을 때마다 투옥되어 총 17번이나 고생했고 끝내 북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육사시집(1946)이 나왔고 다시 ‘청포도’(1964). ‘광야’(1971) 등이 나왔다. 총 34편의 시를 남겼다. 이제 그의 시「청포도」를 감상해보자. ①“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1939년/문장 8월호). 이육사의 대표적인 서정시다. 향토색 짙은 시어로 순수성과 시적 인식이 뛰어나면서도 민족의 수난을 채색하여 끈질긴 민족의 희망을 시화(詩化)한 것으로 평가된다. ⑴서곡 ⑵유서깊은 정서의 응결 ⑶기약하는 미래 ⑷희망과 광복의 도래 ⑸민족의 향연 ⑹정권(正權)에의 대비로 조국 광복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찾아오는 손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②그의 시 「광야」도 읽어보자.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光陰)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내리고/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백마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유고 시집/육사 시집/1946). 이육사의 시와 생애가 민족 수난과 함께 있었고 또한 희생된 시인이기 때문에 민족시인으로 추앙된다. 감옥을 17번이나 드나들던 그가 이 세상에 왔다 간 자취라도 남겨보려 하니 실로 그의 발자취는 자국마다 피가 고일만큼 신산(辛酸)하고 불행한 것이었다. 40세로 요절한 독립 운동가의 생애로 시 34편(한시 3편 포함)을 남겼는데 일제의 침략으로 수난당한 중에 건진 귀중한 소산이었다. 그는 투사였고 지사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시인이었다. ③그의 「절정」(絶頂)이란 시도 읽어보자.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으로 휩쓸어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서릿발 칼날진 그위에 서다//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1940/문장 1월호). 쫒기는 이의 비극을 담은 처절한 서정시다. 육사가 세상을 떠나기 4년전의 작품으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고 간 그의 외침이다. 시인이기 전에 애국지사요, 투사였던 그의 생애는 너무 극한적인 삶이었다. 계속 쫒겨다니는 삶이었기에 시란 그에게 있어서 금강석처럼 굳센 그의 의지의 표현이며 유언을 대신하는 삶의 최후 발언이었다. 이 시는 육사의 절박한 비극감과 민족의 당시 현실이 압축되어서 강인한 남성의 언어로 쓰여졌다. ⑴맵고 고달픈 식민지 시대의 학정을 못이겨 북만주로 유랑생활을 떠났고 ⑵북만주의 황량하고 거친 광야로 막혀있는 현실이 보이며 ⑶어디에도 무릎 꿇고 기도할 수조차 없음과 ⑷마지막 소망인 무지개조차 얼어붙어 강철로 만든 것 같다고 썼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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