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2년의 기다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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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12.  7.

밖에서 요란한 눈보라 소리 때문에 잠이 깼습니다. 시계를 보니 10시 40분입니다. 당신과 헤어진 지 일 년이 되어갑니다. 당신은 지금 시내에서 개인지도를 끝내고 버스로 귀가할 시간인 것을 깨닫고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당신은 이번에는 무슨 특별한 일이 생겨도 다 제쳐두고 집에 오시겠지요? 자고 일어날 때마다 지희하고 손가락을 펴고 당신 오실 날을 세어 본답니다. 이제 꼭 이 주일 남았습니다. 당신 오실 것을 생각하고 작은 방과 큰 방 모두 도배를 마쳐 놓고 주인 오기만 기다리고 있답니다. 어제는 지희가 “아빠는 언제 오신 다냐?” 해서(당신에게는 경어를 쓰고 저에게는 해라 한답니다) “크리스마스 날” 했더니 “오늘 왔으면 쓰것다”라고 하기에 “오늘은 안 돼. 아빠는 공부하시고 시험보시고 오셔야지”라고 하자 “아이 그래도 오늘 오시면 쓰것다”하고 엉엉 울었답니다. 애들이 아빠가 매우 그리운 모양입니다. 

… 오실 때 대전에서 완행으로 오시면 버스가 없어 송정리에서 하룻밤을 주무셔야 하는데 24일 특급으로 오십시오. 차비 차이는 70원입니다. 4시 반에 송정리를 발차하는데 5시 10분에 이곳 학교 앞에서 정차합니다. 연락 주시는 대로 버스 정류소에서 기다리겠습니다. 

1964. 12. 11.

3일부터 시작했던 김장은 8일에 끝이 났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감기를 앓고 있습니다. 기침을 몹시 하고 열이 오르내리고 밥을 먹질 않습니다. 코가 메고 음성이 변해서 석(둘째)이는 변성기의 소년 같은 소리를 냅니다. 충주(의사인 큰처남이 있는 곳)에서 지어온 감기약만 먹이는데 효과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14일이 석이의 두 돌입니다. 그런데 아빠는 남의 집 아이 과외공부 지도하느라 방학에도 나타나지 않고 370일 동안에 석이는 아빠 품에 몇 번이나 안겼는지 고아처럼 가련한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흙을 파먹고 살더라도 얼굴 맞대고 함께 울며 굶으며 지냈으면 좋겠어요. 지난번 충주에 갔다 올 때는 한 나흘, 철(첫째)이와 지희를 떼어놓고 갔다 왔는데 철이가 날마다 버스가 올 때면 정류장에 나가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엄마를 보자 달려들어 울고 어린애들 셋이 모두 무릎에 올라와 법석을 떨었는데 그때는 정말 곁에 없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답니다. 졸업 후 기전학교로 복교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또 방학 때부터 기전학교에 와서 가르쳐 달라던 것은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기전학교의 1, 2월분을 미리 땅겨 받아서 아예 이사할 수는 없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이곳에서 저희의 생활비를 부족하지만, 부모님께 매월 드리고 있는데 막내 도련님의 대학 등록금과 작은아가씨의 중학 등록 및 하숙비, 거기다 큰아가씨의 진학 문제들이 겹쳐서 아버님이 경제난에 시달리기 시작하시자 가끔 노하시는 것을 보고 너무 불안합니다. 작은 도련님에게는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학을 그만두어라. 딸들에게는 중학교만 마치고 가사에 종사하라. 나도 정년이 다 되는데 은퇴할 집이 없다. 이러시면 우리는 모두 불안에 떨어야 하고 더구나 저는 우리 때문에 이 문제가 이렇게 되었다는 결론 같아서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나 외국 유학까지 결심하시고 시작된 공부인데 모든 것이 후회가 없도록 결정이 되었으면 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에 남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정리가 되었는지 제 머리로는 가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오빠는 한 오천 원 대전으로 송금해 주시겠다고 했는데 아무 연락이 없었는지요. 기간이 없는 무이자니까 마음 놓고 쓰십시오.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학 2년의 결산인데 너무 가정과 금전에 구애받지 말고 현명한 판단 있으시기를 빕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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