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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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76)

구미에서 상주까지 (24)

Richard H. Baird,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Oakland: Calif., 1968)이 1968년도에 출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책보다 앞서 Richard H. Baird,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가 나왔는데, 이것은 출판지와 출판사와 출판연도가 기입되지 않지만, 배위량의 일기를 바탕으로 그의 한국선교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타자를 쳐서 묶은 책이다. 아마도 이 타자본을 가지고 1968년도에 리차드 베어드가 Richard H. Baird,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Oakland: Calif., 1968)을 출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필자는 역사가가 아닌 역사가의 주변인으로서 사료도 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만을 가지고 판단하기에 시야가 좁다. 그러므로 이 다음에 전문가가 나타나서 배위량에 관한 사료를 새롭게 발굴하여 새로운 연구를 하길 기대한다. 아니면 배위량의 일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획기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면 새롭게 연구가 이루어지겠지만, 지금 현재 필자의 입장에서는 <일기 1차본>의 편집자와 <일기 2차본>의 필사자가 원활하게 교류하지 못한 채 각자의 일을 행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기 2차본>의 필사자가 배위량의 <일기 원본>를 필사했다면 좀 더 정성들여 필사할 수 있었을 것인데,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지운 부분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리라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배위량 자신이 <일기 원본>를 바탕으로 나중에 <일기 원본>에 필요한 것을 가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1893년 4월 26일 상주 낙동에서 일기를 쓰면서 ‘서울’을 언급하는 부분은 배위량 사후의 1946년 8월 15일 이후 어느 경점에 가필을 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렇지 않으면 리차드 베어드와는 활발하게 교류를 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배위량과는 가까웠고 그리고 한국과 관련되었던 인물이 <일기 2차본>, 즉 <배위량의 제2차 전도여행에 관한 일기>를 옮겨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기 2차본>을 배위량이 생성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이 출판한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 2>의 배위량이 1893년 4월 26일 상주 낙동에서 쓴 일기에 “Seoul road crosses to the west side of the Aak Tong at this place.” (“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란 언급에 나타나는 “Seoul road crosses”(“서울로 가는 길”)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다. 1893년 당시에 한성을, 더욱이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외국인이, 썼다. 당시 사람들도 잘 쓰지 않은 서울이란 말을 한성을 대신해서 썼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당시에 서울이란 말은 어느 도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순수한 한국말로 수도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였다는 점에서 배위량이 1893년 당시의 한성을 서울로 지칭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배위량(윌리엄 베어드, William M. Baird, 1862-1931)은 1931년 11월 28일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평양에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만약 <일기 2차본>이 배위량 일기의 원본이라 <일기 1차본>보다 먼저 기록이 되었다면, 리차드 베어드가 <일기 1차본>을 출판할 때 왜 원본인 <일기 2차본>을 대본으로 하지 않고 다른 엉뚱한 것을 대본으로 하고 배위량의 편지나, 선교 보고서를 더하여 Richard H. Baird,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를 출판했는지에 대하여 대답해야 할 것이다.
성서신학에서 원문을 찾을 때 후기 사본가가 원문을 줄이기는 쉽지 않지만, 그것에 더하여 설명하고 보충하기는 어렵지 않다는 것에 중요한 시선을 둔다. 그런데, <일기 2차본>인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 2>에는 <일기 1차본>인 Richard H. Baird,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에 들어 있지 않은 많은 본문이 들어 있다. 물론 <일기 1차본>에도 <일기 2차본>에 들어 있지 않은 많은 본문이 들어 있다. 그런데, 리차드 베어드는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를 편집하면서 배위량의 일기 원문 + 제 2차 순회전도 여행에 관한 배위량의 선교 보고와 편지를 해당 원문과 함께 편집한다는 것을 밝혀 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일기를 더욱 완성도가 높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기 2차본>에는 그런 사실을 적시하지 않고 배위량의 일기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것은 번역자인 이상규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편집팀이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 2>을 출판할 때 그 대본이 된 일기가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을 기록한 <일기 원본>일 것이란 확신으로 번역하고 출판했다는 데서 찾아야할 것이다.
여기서 <일기 2차본>가 배위량이 제2차 순회전도여행을 감행하면서 전도 여행 현장에서 기록한 <일기 원본>, 즉 <일기 2차본>이라면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1. 리차드 베어드는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를 출판할 때 왜 <일기 원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는가?

2. 만약 <일기 2차본>이 배위량이 제 2차 순회전도 여행시에 기록한 <일기 원본>이라면 리차드 베어드는 왜 그 원본을 대본으로 삼지 않았는가?

3. 리차드 베어드가 대본으로 삼았던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NP: N.P.)의 대본이 일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누가 어디서 왜 만들었을까?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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