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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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78)

구미에서 상주까지 (26)

그것은 배위량은 순회 전도할 당시에 때때로 부산의 집으로 아내 안애리(安愛理, 애니 로리 아담스 베어드[Annie Laurie Adams Baird, 1864-1916]의 한국 이름)에게 순회 전도여행 중에 가끔 편지를 썼고 그 편지를 인편으로 보낸 사실을 일기에 적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배위량의 <일기 1차본>과 <일기 2차본>이 다른 것은 아래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1. 배위량의 아들 리차드 베어드가 , 즉 <일기 1차본>을 출판할 때 배위량의 일기 원본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배위량이 미국선교본부에 보낸 선교보고서와 아내 안애리에게 보낸 편지를 첨가한 것 때문이다.
2. 익명의 필사자가 배위량이 순회 전도 여행시에 기록한 <일기 원본>을 기본으로 하여 <일기 2차본>을 손으로 다시 베겨쓸 때 그대로 옮겨쓰지 않고 <일기 원본>에 더하여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 주석적인 첨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위량이 제2차 순회전도 여행 중에 1893년 4월 22-24일 간에 머무르면서 대구에서 쓴 일기가 <일기 1차본>과 <일기 2차본>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배위량이란 한국 선교사가 복수의 사람이 있었고 각각 다르게 일기를 썼다면 그 다름이 이해가 될 것이다.
1893년 4월 22-24일에 쓴 일기만 놓고 본다면 배위량이란 이름을 가진 각각 다른 두 사람의 선교사가 각각 다른 상황에서 일기를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만약 배위량이 두 사람이고 그들이 각각 다른 상황에서 ‘그날 그날’의 일기를 썼다면, 그날 쓴 일기가 당연히 두 개가 될 것이고 그것들이 각각 다르게 전승되어 출판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실이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즉 배위량이 한 사람이었다면, 1893년 4월 22-24일에 쓴 일기 원본은 당연히 한 개만 있어야 된다. 그래서 후대 사람인 우리는 그 한 개의 원본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배위량이 쓴 일기 원본은 한 개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본 일기가 하나 밖에 없다는 지극한 단순한 이유로 우리는 한 개 밖에 없는 <원본 일기>를 반드시 찾아야 할 당위성을 가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배위량이 일기는 두 개로 전승된다. 그리고 두 개의 일기가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특히 1893년 4월 22-24일에 쓴 일기는 완전히 다르다. 두 개의 다른 일기가 존재한다면 분명 한 개는 ‘2차본 일기’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판단하기에 <일기 1차본>에는 나오지만, <일기 2차본>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 즉 배위량이 4월 21일에 청도 안새월[안새부리]에서 잠을 잔 것에 대한 기록과 대구로 들어오는 장면을 기록한 부분을 기록한 배위량의 1893년 4월 22일 대구에서 쓴 일기가 아래와 같이 완전히 다르다. 이미 2021년 7월 31일자의 「한국장로신문」 제1744호 7면에 실은 것이지만, 독자들이 그 차이를 알도록 다시 한 번 전제한다.

<일기 1차본>–
<4월 22일 토요일 정오, 대구>
대구에 방금 도착했는데, 지금은 오후 한시경이다. 어제 오후에는 안새부리(Ansaipyuri)라는 작은 마을에서 예정보다 일찍 쉬었다. 2~3시간은 더 갔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높은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마부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쉬는 것 외에 우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책을 구입하기를 원할 때 길을 잠시 멈추었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설교를 자주 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책자들이 나누어 주었다. 점심 전에 대구에 도착하기 위해 우리는 일찍 길을 나섰다. 우리는 제법 높은 팔조령을 넘어야 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아주 길고 좁은 골짜기로 들어섰는데, 이 골짜기가 점점 넓어지면서 대구지역의 분지로 연결되었다. 장작을 실은 우마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큰 도시로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yung,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대규모 시장)에 온 상인들로 인해 도시 곳곳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나갔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 도시에는 3,7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세배쯤 되는 약 10,000가구 정도가 된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인구는 한 50,000명 정도 될 것이다. 내 생각에는 통영보다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떤 이들은 대구가 더 크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통영, 마산, 진주, 크기가 엇비슷하다고 한다.

그런데, <4월 22일 토요일 정오, 대구>란 제목으로 된 부분은 배위량의 일기 원본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배위량은 <4월 22일 토요일 정오, 대구>란 제목으로 미국선교본부에 선교 보고서를 썼다. 필자는 배위량을 연구하는 동안 배위량의 <일기 1차본>과 <일기 2차본>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을 보면서 <일기 1차본>은 <일기 원본>에 ‘배위량이 미국선교부에 보낸 선교보고서’ + ‘배위량의 편지’를 더한 것이고 <일기 2차본>은 <일기 원본>을 보고 그것을 옮겨 적은 익명의 필사자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덧붙여 <일기 원본>에 주석적인 해석을 가미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런 가정을 하면서 배위량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이번 호의 글인 “배위량 연구 99. 구미에서 상주까지 (26)”를 집필하면서 <윌리엄 베어드 저/숭실대학교 뿌리찾기위원회 역주,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서울: 숭실대학교 지식정보처 중앙도서관 학술정보출판팀, 2016; 22017)>를 만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언급된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추측한 가정 중에서 이 글 위에 언급한 <이유 1> 부분에 대한 가정이 틀리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위에 적시한 <윌리엄 베어드 저/숭실대학교 뿌리찾기위원회 역주,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서울: 숭실대학교 지식정보처 중앙도서관 학술정보출판팀, 2016; 22017)>의 70-71쪽에 <일기 1차본>에는 나오지만, <일기 2차본>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 수록되어 있다.(<일기 원본>을 손으로 베껴 쓴 수기로 된 <일기 2차본> 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상규가 <일기 2차본>을 번역할 때 이상규는 에 나오는 해당 부분을 다시 번역하여 첨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붙였다.

* 이상이 4월 22일자 윌리엄 베어드 일기의 전문이다. 그러나 윌리엄 베어드의 아들 리처드 베어드가 편집한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1968), 32쪽에는 아래와 같은 동일자의 다른 기록이 있어 아래에 전재한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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