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지성2] 역사를 바꾸는 작전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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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바빌로니아제국, 앗시리아제국 등 패권 다툼이 많았고, 분열주의가 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페르시아가 대두하여 앗시리아제국 다음으로 기원전 525년에 오리엔트 지역을 대부분을 장악하여 다리우스(Darius), 크세르크세스(Xerxes) 등을 중심으로 통일제국을 이룩하였다. 이 과정에서 헬라의 폴리스들인 아테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제국 간에 페르시아전쟁(B.C. 492~479)이 3차례 벌어졌다. 국가의 규모나 군사력으로 보아 헬라의 폴리스들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전쟁이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의 해군우선정책의 결과로 결국 살라미스해전(Battle of Salamis, B.C. 450)에서 페르시아군이 패배하고 헬라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이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전쟁이 포에니전쟁(Poenic War, B.C. 264~146)이다.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 군사가 알프스산을 넘어 이탈리아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하여 칸네전투(Battle of Canae, B.C. 216)에서 로마군이 완패하였다. 이 때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가 이끄는 로마군이 한니발 군사의 본토 카르타고를 역습하였다. 이 전투가 유명한 자마전투(Battle of Zama, B.C. 202)이다. 아마 로마군 총 지휘관 스키피오의 카르타고 역습작전이 아니었더라면, 로마제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로마제국인들은 네로(Nero, 64)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303)까지 250여 년간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10대 박해 가운데서도 데키우스(Decius, 249~251) 때의 박해는 더욱 혹독했다. 로마의 카타콤(catacomb)의 역사는 눈물겨운 피의 역사다. 마침내 이교도출신 막센티우스(Maxentius)의 군사와 기독교 지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군사 간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밀비아교전투(Milbian Bridge War, 312)가 벌어졌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의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전기(Viata Constantini)」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상징물을 때라 정복하라(In hoc signo Vinces)는 꿈의 계시에 따라 밀비안교를 건너오는 이교도 군사와 전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312년 콘스탄티누스 군사의 매복작전은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하마드(Muhammad)가 632년 사망 후, 칼리프들에 의해 계승해 오다가 시아 알리(Shia Ali) 이후 분쟁이 생겨 시아파와 수니파로 분열되어 동방과 서방으로 공격해 왔다. 기독교를 지지하는 프랑크왕국의 칼롤루스 마르텔(Charles Martel) 군사와 이슬람교를 지지하는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의 이슬람 군사 간에 투르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Poitier, 732)가 있었다. 이 때에 마르텔의 군사작전이 실패했더라면, 유럽이 기독교 문명화하는 데에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장군의 노르만디 상륙작전이나, 6‧25 때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실패했더라면, 역사는 독재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위대한 역사 창출 배후에는 전쟁 영웅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지혜가 없는 작전은 실패가 기다릴 뿐이다. 역사를 성공으로 이끄는 참 지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삼손(Samson)은 데리라(Delilah)의 유혹에 하늘의 지혜를 상실했다. 지혜의 상실은 비참한 비극을 초래하였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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