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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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82)

구미에서 상주까지 (30)

필자의 생각에는 리차드 베어드가 <일기 1차본>을 편집할 때 대본으로 한 일기 원본에는 그 내용이 없었다고 판단된다. 필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선교 일기인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뺏든지 아니면 실수로 그것을 빼고 편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뺏다면 그것에 대한 의도가 분명히 있었을 것인데,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뺏다고 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그것을 실수로 빼고 편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뺄 정도로 치명적으로 틀린 내용도 아니고, 그것이 배위량의 치명적인 실수라서 배위량 자신이나 후손에게 치명적인 불명예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이라서 배위량의 명예를 존중하고자 의도적으로 뺏다고 볼 정도의 내용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실수로 빠질 개연성도, 그리고 의도적으로 뺄 개연성도 아주 희박하다.
이 점에서 아래와 같은 2가지 가필론(加筆論)을 예상하게 된다.
1. 필자는 <일기 1차본>과 <일기 2차본>이 대본으로 한 일기 원본이 다르든지 아니면 리차드 베어드가 <일기 원본>을 중심으로 선교보고서와 편지를 모아서 <일기 1차본>을 편집한 뒤에 배위량의 <일기 원본>을 다시 정서(正書)하여 필사본을 만들면서 <일기 원본>에 필요한 부분을 덧붙여 필사본을 만들었든지 아니면 그 원본 일기가 적힌 종이 여백에 가필(加筆)을 해 두었는데, 그것을 후세 사람은 저자가 수정한 원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상규가 번역한 수기 일기는 <일기 2차본>, 즉 배위량의 가필(加筆)된 일기를 대본으로 한 번역서가 된다.
2.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가필(加筆)의 시작은 배위량이 했지만, 가필의 완료를 1946년 8월 15일 이후에 어떤 가필자가 완성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런데 이런 경우라면 그 가필한 부분을 배위량의 아들 리차드 베어드도 알아야 마땅하고 그가 그것을 <일기 1차본> 편집에 반영해야 마땅한데, 리차드 베어드가 편집한 <일기 1차본>에는 그 가필된 부분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 점에서 리차드 베어드가 <일기 1차본> 편집할 당시에 가필이 이루어진 수기 일기의 존재를 몰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기 원본>에 가필을 언제 시작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946년 8월 15일 이후의 어느 경점에 완료된 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리차드 베어드는 가필된 일기인 <일기 2차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필자가 이렇게 추측하고도 해결해야 할 것이 많고 그 모든 것이 쉽지 않다. 그중에 하나의 큰 산과 같은 과제는 1893년 4월 22일 토요일 정오에 대구에서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일기 2차본>의 아래 내용은 어디에서 기원된 것인지 오리무중이다.
달력 몇 부를 분배했다. 멋있는 점은 광택의 비석(10x3x1 1/2ft)이 우리 가까이에 서 있는데, 거기에는 우물이 150년 전에 만들어졌고, 주위에는 2120계단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일기 2차본>에 나오는 위의 내용은 과연 1893년 4월 22일 토요일 정오에 대구에서 쓴 배위량의 친필 일기일까? 위의 필자는 <일기 1차본>의 1893년 4월 22일 대구에서 기록한 일기 전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기 2차본>에는 1893년 4월 22일 토요일 정오에 대구에서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역량 밖이라 판단되어 후세의 학자들에게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단지 위의 글이 평소의 배위량의 일기와는 문체나 내용적으로 너무 차이가 난다. 대단히 학문적인 내용이라서 배위량이 순회전도 여행 현장에서 기록했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필자가 이 문제를 필자의 역량 밖이라서 후세의 학자들에게 과제를 남기고자 하는 이유는 그래도, 혹 배위량의 친필 글일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이다.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이 신앙적인 열심히 한국에서 선교를 했지만, 선교사들 중에는 대단히 학자적인 마인드를 가진 분들도 많았다.
그중에서 배위량은 한국의 인문학의 아버지라 불려도 될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다. 그런 점에서 배위량의 글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단지 배위량의 평소의 다른 일기와 문체와 내용이 너무 다르게 생소하다는 것 때문이다.
이제 필자는 그동안 수회에 걸쳐 배위량의 일기 원본과 <일기 1차본>과 <일기 2차본>에 관한 글을 실었는데, 독자들도 재미없어 하고 필자에게도 힘든 내용들이라, 결론적인 글을 이제는 싣고 이 논쟁을 끝내야 할듯하여 몇 가지 가정과 함께 필자 혼자만의 논쟁을 매듭짓고자 한다.
1. 배위량이 선교 현장에서 쓴 <일기 원본>은 있었지만 출판된 두 종류의 책, 즉 <일기 1차본>= “”과 <일기 2차본>=이상규 옮김,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 2(서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2013)은 <일기 원본>으로 편집하거나 번역하지 않았다.
1) 리차드 베어드는 <일기 원본>에 선교 보고 +배위량의 편지를 더하여 <일기 1차본>을 편집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이다.
2) 이상규는 <일기 원본>에 가필(加筆)을 <일기 2차본> 일기를 보고 번역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일기 2차본>=이상규 옮김,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 2(서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2013)이다.
3. <일기 1차본>과 <일기 2차본>을 대조하여 공통된 분분이 <일기 원본>이다.
4. <일기 2차본>은 배위량이 시작했을 수도 있지만(물론 다른 가족이 시작했을 개연성도 있지만) 그 완성은 빨라야 1946년 8월 15일 이후이다.
5. <일기 원본>을 보고 수정하기 위해서 가필을 가한 <일기 2차본>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완성자를 찾아야만, 그 완성된 생성 시기를 특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일기 2차본>을 배위량이 완성하지 않았다면 <일기 2차본>의 생성자는 배위량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로즈 페트롤프(R. M. Pettrolf)일 확률이 높다. 그녀는 남편 배위량으로부터 그가 젊었을 때 경상도 내륙지역을 순회전도했던 내력을 많이 들었을 것이고 그것을 정리해야 할 책임감을 가졌을 것이다.
로즈 페트롤프가 <일기 2차본>의 완성자가 맞다면 그녀는 왜 <일기 1차본>의 생성자인 리차드 베어드에게 <일기 2차본>을 주지 않았을지에 대하여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배위량 사후 첫째 부인의 아들들과는 활발하게 교류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배위량의 <일기 원본>를 바탕으로 각각 다른 두 일기가 나오게 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부족하지만, 필자 혼자만의 논쟁을 끝내고자 한다. 비 전공자가 파고들기에는 엄청난 문제를 내재하고 있어 후세의 사가(史家)들에게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다음 호부터는 또 다시 원래의 글로 돌아가 배위량의 순례길을 걸으며 묵상하고 느낀 것들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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