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이란 선교의 출구전락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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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교혁명으로 많은 사람이 대량의 유혈 참사, 분열, 낙담에 시달렸다. 보잘것없는 이익을 위해 막대한 희생이 치러졌다. 그것은 신정의 폭정이 1979년에 바뀐 체제보다 더 잔인하고 부정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격렬한 반서방, 반기독교 선전은 많은 회교도에게 모든 문제의 해답을 거기서 찾게 함으로써 역효과를 가져왔다. 편협과 증오, 잔인함과 극단주의에 기인한 고통은 평화의 왕인 예수와 복음에 그들의 마음 문을 열게 할 것이다. 

회교혁명의 호메이니는 1989년에 사망했다. 90억 달러에 달하는 웅장한 무덤과 새로운 성시(聖市)가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지고 있다. 아직도 호메이니가 지녔던 반감과 분노의 유산이 살아 있다. 회교도를 지배하고 있는 사단의 조직이 깨어지고, 사람들이 예수의 사랑과 은혜를 알아 예수께 나아오며 또한 이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기도하자. 

혁명 이후 이란의 많은 회교도들이 기독교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회교에 대한 환멸이 미약하지만 널리 퍼져 있다. 1979년에는 한때 회교도였던 200-300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오늘날 이란에는 이란인 난민 가운데 있는 신자를 포함하여 6,000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이 이란인 사이에서 거둔 풍부한 첫 열매이다. 이보다 더 많은 이란인들이 은밀하게 신자가 되고 있다. 

기독교인의 90% 이상은 회교 문화와는 동떨어져 있고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인 아르메니아와 아시리아 출신이다. 그들의 존재는 인정되었지만 공포, 불안, 탄압, 심문, 여성에게 회교 의상의 강요, 아이들에 대한 회교 교육은 그들 사회에서 이민율을 크게 증가시켰다. 그들의 교회 안에 성령이 역사하도록 기도하자. 

개신교회들은 혁명 전에 대체로 소규모였고 소극적이었으나, 혁명 이후 활동적으로 변했다. 헌신하는 사람들과 교회 출석률이 증가하고, 성공회, 장로교, 오순절교 사이에 교파 간의 벽이 낮아지게 되었다. 일부 신자는 열렬히 믿음을 증거하며 문서를 배포하고 있다. 오순절교회 12명의 목사 중 10명이 투옥당하고 1명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박해와 이민으로 신자가 계속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신자들이 많이 늘고 있다. 처음으로 페르시아 복음주의자들의 수가 소수 종족의 기독교 신자를 압도하게 되었다. 이 신자들이 신앙을 확고히 유지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도록 기도하자. 

1988년 이전에 복음주의 기독교인에 대한 종교적 박해가 널리 확산되지 않았지만, 이라크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로 그 핍박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스파이들이 기독교 집단 내부로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집회는 금지되고, 일부 교회 건물은 폐쇄되었으며 공개적인 복음 증거는 모두 불법으로 간주되고 있다. 종교적 박해가 특히 과거에 회교도였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해지고 있다. 이러한 비기독교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자. 과거에 회교도였던 신자들 대다수가 참석하고 있는 성공회는 특히 심하게 고통 받고 있다. 해외로 부득이하게 도피해야만 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소기천 박사

<장신대 성서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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