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두 캠퍼스의 대학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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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남 학장은 두 캠퍼스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대전에 황희영 부학장을 두고 두 캠퍼스에 교목실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총무처장을 한 명씩 임명하였다. 결국, 한 대학에 동등한 자격을 가진 실장, 처장 2명씩을 각 캠퍼스에 임명한 것이다. 이때문에 곤혹스러운 것은 교육부(문교부)였다. 대학에 공문을 보낼 때 두 캠퍼스에 따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로 공문을 보내면 서울에서 대전으로 공문을 이첩하였다. 전국 학생처장 회의가 있으면 대전에 알리지도 않고 서울 처장이 참석하고 대전에는 회의 결과만 연락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전의 다른 지방 대학 처장은 “너는 학생처장이라더니 왜 회의에 나오지도 않니?”라고 대전 캠퍼스 처장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졸업 시기에 교육부에서 그해 숭전대학 졸업생 명단을 제출하라고 지시하면 서울에서 대전에 연락하고 그 자료를 받아 서울에서 종합해서 교육부에 졸업생 명단을 제출하는 이중적인, 비효율적 행정 업무를 해야 했다. 도서관은 도서관대로 아우성쳤다. 매월 국립 도서관에서 보내온 정기 간행물이 대전 캠퍼스에는 갑자기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한 대학인데 자료를 두 군데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국립 도서관에 보내어 정기적으로 보내주던 귀중한 자료들은 보내 달라고 구걸해야 했다. 차라리 서울 캠퍼스를 본교, 대전 캠퍼스를 분교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도 있었지만, 대전 캠퍼스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분개했다.

김 학장은 두 캠퍼스가 한 대학이라는 가시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두 캠퍼스에서 발행하고 있는 대학신문을 하나의 이름으로 발행하는 일이었다. 대학이 하나인데 어떻게 다른 이름의 두 신문을 발행할 수 있는가? 따라서 『숭실대학보』와 『대전대신문』를 하나로 만들어 통합신문을 발행하는 초대 신문사 주간을 내가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김 학장은 대전 캠퍼스에 주간을 맡기면 아마 서울 캠퍼스와의 마찰이 완화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대전 캠퍼스에서 주간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한 듯했다. 

대전 캠퍼스 황희영 부학장은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대학신문의 맥을 이어 제4호부터 6호까지 내가 주간으로 신문을 발행한 경험이 있는 것을 알고 추천한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수학과 강사가 통합신문사의 주간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때 편집부장도 수학과의 신기영 학생이었다. 당시 서울 캠퍼스에도 신문사 전문위원, 주간, 편집국장 가지들이 엄연히 존재했었다. 그런데 대학신문에 주간 두 사람 이름이 오를 수 없어서 내 이름을 넣자는 것이었다. 이건 내게 큰 부담이었다. 통합신문의 제호를 무엇으로 하느냐도 문제였다. 『숭실대학보』의 지령 132호(대전은 46호)의 역사성을 고려하여 어떻게든 ‘숭실’의 이름을 넣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제호를 『숭전대학신문』이라고 정하고 두 캠퍼스에 유일한 신문 제179호를 발행하기로 했다. 인쇄는 서울이 시설이 우수해서 서울에서 하기로 하고 기사를 믹스(섞어)해 신문에 올리기 위해 나는 대전 편집국장과 기자들을 인솔하여 서울 캠퍼스로 갔다. 2박 3일의 합숙이었다. 그런데 서울 캠퍼스의 전문위원과 주간과는 전화로 잘 약속이 되었는데 기자들과 편집국장이 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우리를 거부했다. 서울 측 신문 전문위원이 기자들을 따로 불러 총장의 뜻을 전하며 겨우 학생들을 무마하였다. 그런데 기사를 믹스하는 것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각 캠퍼스의 행사기사가 있을 때 서울 기사를 먼저 쓰고 뒤에 “한편, 대전은…” 이렇게 쓰면 대전이 반발하였다. 기사가 넘칠 때는 빼고 넣는 것도, 서로 싸움이었다. 

이런 진통을 겪으면서 기자들이 매회 교대로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합숙하는 고비용 통합신문을 2년 반을 버티며 주간 노릇을 했다. 다행히 양교의 신문 지도 위원은 신사분이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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