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아내 초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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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학에는 한국 학생들이 꽤 많이 와서 살고 있었다.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부부 아파트가 있어 부부는 따로 집을 얻어 살 수가 있었다. 가끔 한국 학생과 어울렸는데 어떤 학생이 나더러 “오 형”이라고 부르자 “오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옆에서 주의를 시켰다. 아저씨 뻘인 나를 그렇게 친구 부르듯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숙대 출신들로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석사나 박사 학위를 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야, 자 하는 처지가 못 되어 많이 불편했다. 

교회는 학교 가까운 People’s Church에 나갔는데 250명쯤 모이며 파이프 오르간도 있는 웅장한 교회였다. 그러나 바로 랜싱 한인침례교회로 옮겼다. 인원은 적었지만, 목사님이 좋았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송용필 목사를 만났다. 그는 수원에서 양아치 소굴에 끌려가고, 미군들 구두 닦기를 하고 지냈다는 유명한 분이다. 김장환 목사님의 도움으로 밥 존스 대학을 마치고 미시간의 그랜드래피즈 신학대학원을 마친 분이었다. 신학생일 때부터 랜싱 한인교회를 개척했다가 1975년 사우스침례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계속 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교회였다. 그분은 내가 아내를 초청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 

아내는 나이가 든 남편을 보내고 나서 걱정이 되었는지 미국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부모님은 내 집에 오셔서 애들과 함께 계셨다. 그래 고1, 중2, 3 초등학교 5학년의 애들을 어머님께 맡기고 아내가 미국으로 오겠다고 하자 “내가 도울 수 없으니 네가 가서 도와라. 애들은 우리가 돌보겠다”고 은퇴하신 부모님은 허락하신 모양이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조교 장학금은 9개월 단위였다. 1976년 9월에 왔던 나는 장학금이 1977년 6월까지였다. 그런데 아내 초청은 10월이 넘어서였기 때문에 다음연도 장학금이 확정된 뒤라야 했다. 

물론 박사 학위 신청자의 장학금이 1년에 끝날 이유는 없었지만, 대학의 부부 아파트 신청은 내년도 재학생이라야 했고 아내가 코사인(cosign)을 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해외여행 절차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먼저 내가 가족 초청을 하기 위해서는 국제 학생처에서 I-94 서식을 받아 시카고의 공관 확인을 받아 한국으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내 재학 증명서와 $3,000 이상의 은행 잔액증명, 아니면 재정보증인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1977년 10월 이후의 초청은 먼저 내가 장학금 수혜자라는 게 확증되어야 그때 재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학금 확정은 매년 3개월 전이기 때문에 1977년 6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나는 지난 가을 학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수학 지진아반 두 반은 그대로 학생들의 불만 없이 잘 지도했지만 내 성적은 엉망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원 학생이라면 거의 A 학점을 받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나는 모두 B 학점이었다. 대학원 학생이 한 둘이면 A를 맞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수학과 유급조교도 90명이 넘었다. 그래서 다 A를 맞으라는 법은 없다. 학부 학생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봄 학기에도 성적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신에 절망하였다. 이런 상태로 박사과정 자격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데려오면 또 어떻게 살 것인가가 걱정되어 여름학기 한 반을 맡아 학생을 지도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11개 반밖에 없었는데 모두 박사과정을 하는 조교들에게 빼앗기고 아무 반도 얻지 못했다. 한편 기숙사비가 비싸 나는 한국 기혼 학생이 있는 방에 방세 반을 내고 들어가기로 했다. 그는 아내가 먼 곳에서 모발 가게를 하고 있고 자녀도 있어 별거하고 있었다. 

그는 주말에는 아내 집으로 가서 나는 넓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앨라배마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친구가 둘이나 이곳에 들러 자고 가기도 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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