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댈러스의 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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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유학생인 나는 새살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한 사람의 장학금으로 세 식구가 살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얼마 동안은 아내가 가지고 온 돈으로 꾸려갔지만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가 할 수 있는 부업은 없을까 하고 궁리했지만, 학생 배우자 비자(F-2)로 노동하는 것은 불법이었고 또 신고하지 않은 허드렛일로 베이비시팅(아기 봐주기)이나, 가사도우미 등은 보수도 빈약하거니와 또 영어가 되어야 했다. 거기다 내 수학 성적은 계속 저조했다. 사실 나는 대학에서 수학의 기초를 튼튼히 쌓지 못하고 다른 활동을 너무 많이 했다. 첫 번째 박사 자격시험에 실패하고 다시 두 번째에 도전했으나 거기서도 낙방이었다. 이제는 다시 한국에서 받았던 석사를 또 받고 귀국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 능력이 되지 못하니 일 년간 미국 생활을 함께 하고 귀국하자고 아내에게 말했다. 고국에서는 패잔병으로 돌아가는 나를 어떻게 받아줄 것인가? 또 아내는 나를 돕는다고 와서 귀국하면 무슨 체면이 되겠는가? 그동안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계속 나에게 열린 문을 주셔서 승승장구하였다. 이제 문이 닫히자 나는 그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게을리했던 것을 기억했다. 교회의 땅을 밟고 다니며 교인인 체하고 살았지 주님 뜻을 항상 묻지 않고 오만하게 살았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오만이었다. 2년이면 개선장군으로 귀국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모르고 세상과 대적하려던 오만이었다. 하나님께서 치시면 패잔병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귀국하겠다고 회개했다. 

난감한 상태로 귀국을 두고 기도하고 있을 때 텍사스에 있는 댈러스가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해왔다. 한국에서 친구로 있다가 댈러스로 이민해서 사는 민 집사와 전화 연락이 되었는데 그녀는 댈러스에 오면 여성이 일할 기회가 많으며 학위를 마치는 데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한 달에 $1,000 수입은 보장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액수였다. 그때 내 조교 장학금은 월 $450이었다. 아내는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손짓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의 어려움은 두뇌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다. 나이가 많으면 자연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끝까지 노력하면 승부는 나게 마련이다. 장기전을 하자. 애들의 학비와 생활비는 자기가 벌어 보겠다. 패잔병으로 돌아가는 부끄러움을 생각하면 무슨 일은 못 하겠느냐 이런 단호한 신념이었다. 아내는 믿기지 않으면 자기가 직접 댈러스에 가서 그 정보의 허실을 진단해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다간 우리는 돌아갈 여비까지 써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믿지 않았다. 더구나 언어소통도 충분하지 못한 아내가. 그러나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의 결론은 미시간에서 석사를 마치고 이삿짐을 싸서 댈러스로 가는 것이었다. 가서 그쪽 사정을 알아보고 여의찮으면 거기서 귀국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나에게 늘 친절하던 인류학을 공부하러 온 김 양이 형부에게서 물려받은 포드의 매버릭(Maverick) 차를 꼭 나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다. 자기는 차 유지하기만 힘드니 이사할 때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 마음씨 때문에 정말 감사했지만, 마음이 좀 뒤틀려 있었다. 실패하고 떠나는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때 랜싱 한인 교회의 집사였던 의사로부터 중고차, 지엠의 올즈모빌(Oldsmobile)을 살 계획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도 거저 주는 차는 받기 싫다고 윤 양의 차는 거절했지만, 결국 이삿짐을 싣기 위해서는 두 차가 필요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기로 되어있던 박 박사가 그 차로 우리를 댈러스까지 이삿짐을 실어다 주고 귀국하겠다고 자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보스턴에 매형이 있어 귀국 길에 매형을 만나보고 가겠다고 했지만 그런 결심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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