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댈러스의 손짓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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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박사는 에어컨도 없는 매버릭으로 막내아들과 함께 이삿짐을 나누어 싣고 길을 안내하며 떠났고 나는 의사 집사로부터 싸게 산 올즈모빌에 짐을 싣고 서툰 운전으로 처음 장거리 여행을 시작하였다. 6월 말의 한더위가 시작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박 박사는 미국 와서 여행도 못했을 텐데 가는 길에 시카고 관광도 하고 가자고 여유있는 말을 했다. 나는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3박 4일의 일정으로 댈러스를 향해 출발했다. 사실 나는 그때 무엇을 관광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박 박사는 참으로 친절한 총각이었다. 나는 이틀째 밤에 처음으로 집에서 뜯어보지도 못하고 들고나온 두 통의 편지가 생각났다. 하나는 별로 편지를 주지 않던 내 큰동생이 보낸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머니가 보낸 편지였다. 그 두 편지는 충격적이었다. 동생이 보낸 것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의 병세가 나빠지고 있는데 애들이 셋이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어머니는 너무 힘드신 것 같다. 걱정이 될까 봐 형에게는 편지를 않고 계시는 것 같은데 꼭 학위를 마쳐야만 하겠는가? 집으로 돌아와 큰아들의 의무와 자녀들 돌보는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 형의 나이는 자신보다는 자녀를 위해 살 때인 것 같다. 자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며 대학 입학 경쟁이 얼마나 심각한지 멀리서는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동생은 여러 번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대담하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써 보낸 것 같았다. 애들은 아내가 떠난 뒤 부모님께서 함께 사시며 돌봐주고 계셨다. 어머니의 편지는 조금 더 조심스러운 투로 써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애들은 책임지겠다고 했으나 결국 내 아들이 아니고 너희들 아들인데 행여나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고등학교는 좀 잘못 들어갔다 할지라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대학을 가야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학교를 어떻게 지원을 시켜야 좋을지, 행여나 내가 잘못해서 너희들에게 평생 원망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특히 지희(큰딸)는 고3이 되어선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집에서도 가끔 졸도하는데 지난번에는 학교에 가다가 졸도하여 업혀 돌아온 일이 있다. 이러다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아느냐? 만일 미국에서 공부가 더 오래 계속되어야 한다면 너(아내)라도 귀국하면 어떻겠니? 여자가 밤늦게 다니는 것도 조심스럽고 해서 지희가 귀가할 때는 내가 버스 정류장에 나가 기다리곤 하는데, 기다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이러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지 걱정이다…

내가 이 편지를 떠나기 전에 받았더라면 댈러스로 떠나지 않고 바로 귀국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패잔병으로 귀가하는 내 초라한 모습이 떠올라 더욱 비참하였다. 윤 양의 친절과 박 박사의 친절이 불쌍한 내 처지의 동정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댈러스에 가서 모든 것이 여의치 않으면 곧 귀가하고 이 모든 쓰라림을 감수하겠다고 주께 맹세하였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앞으로 인도하실 분도 하나님이다. 나는 그분에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자 마음이 좀 안정되었다. 윤 양의 친절도 박 박사의 친절도 순수하게 받자는 대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준 것도 하나님이다. 그들을 시켜 내가 댈러스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그들을 권고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왜 내가 변론하는가? 나는 순종하기만 하자고 생각하였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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