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2)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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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자를 사랑하던 어린이 ①

회개 외치던 예언자적 목회자

마흔 일곱 나이에 세상 떠나

천여 명 참여한 장례식장

그 업적 인품 그리워 눈물바다

새로운 세기의 막이 열렸던 주후 2000년 7월 15일은 황광은(黃光恩) 목사의 3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그가 우리 마음에 깊이 남아 있고, 앞으로도 길이 남아 있게 될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 주위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예언자적 목회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뿐 아니라 사회를 향해서도 회개를 외치는 사람이 예언자적 목회자이다. 그 외침이 권위를 지니기 위해서는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고 또 청빈(淸貧)해야 함은 물론이요. 믿음의 경건과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언변 내지 문학적 소질이 있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와같은 예언자적 목회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황광은 목사라고 생각한다. 

황광은 목사. 그는 임종을 나흘 앞둔 때에 병상에 누워서 잘 움직이지 않는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다.

병 중에서도 내 병처럼 가벼운 병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사랑에 관해서 10년은 설교해 왔지만 이제야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기 시작한다. <위를 보고 걸어라. 왜? 눈물이 떨어질까 보아서> 이런 노래가 유행했지만… 나는 최근 눈물을 삼키는 버릇이 생겼다. 이 나이에 무슨 눈물을 새삼스레 보일 것인가 해서다. 그러나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은 나는 그처럼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0년 7월 15일 오후 3시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나이 마흔 일곱. 아무리 에누리를 해도 그동안 배우고 체험한 바를 펴야 할 그런 나이였다.

임종할 때 그는 권력자도 아니었고 재벌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권력에 눌린 자요 가난한 자였다. 그러나 그를 사모한 사람은 너무나 많았고, 그의 죽음을 아쉬워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1970년 7월 17일 금요일, 오전 10시 정각. 동대문구 신설동에 자리잡은 대광고등학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천 명이 훨씬 넘었다. 궂은 비가 뿌리는 날이었는데도.

한국교회의  아사셀 양

국내의 일간지들은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크리스챤신문’의 창간과 편집 및 ‘새벗’지의 편집장을 역임한 바 있는 황광은 목사가 영암장로교회에서 시무 중 숙환인 심장질환으로 지난 15일 입원 중인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 그 고별 예배가 지난 17일 대광고등학교 강당에서 거행됐다.

각 교단의 교역자 및 교우 친지들과 평소에 친밀하게 지내던 친지와 친척들이 모여 고인이 가심을 애타게 울부짖으며, 생존시의 그의 자비한 인품을 되새긴 이날 고별 예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대광고등학교 관현악단에 맞춰, 생존시 황 목사가 시무하던 영암교회 성가대가 부르는 조가가 은은히 장내에 퍼지는 가운데, 이귀선 목사 사회로 거행된 이날 식장은 황 목사의 가심을 애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장사진을 이룬 가운데 장지인 퇴계원 가족 묘지를 향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유선 여사와 아들 승균, 승국 씨와 딸 진숙 은숙 양 외에 형제분이 남아있다.  -조선일보-

영암교회를 시무 중에 있던 황광은 목사가 지난 15일 하오 10시 심장 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47세로 세상을 떠난 황광은 목사는 그의 짧은 생애 중 목회자로, 또는 사회사업가로, 문필가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1923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과 비율빈 YMCA대학을 졸업, YMCA 운동과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기여했고, 저서로는 ‘황광은 동화집’ ‘노래하는 섬’ ‘설교집’ 등을 출판, 교회 할동으로 전국 복음화운동의 부총무, 제5회 기독교 교육대회 간사, 기독교 연극 단체 육성에도 앞장서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17일 상오 10시. 대광고등학교 강당에서 거행. -한국일보-

한편 그가 잠시 교목으로 일한 적이 있는 대광고등학교에서 간행하는 ‘대광 뉴우스’는 다음과 같은 기사로 그의 별세를 추모하였다.

1960~1961년까지 본교 교목으로 계시던 황광은 목사님께서 지난 7월 15일 오후 3시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자타가 공인하는 유능한 청소년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는 빛의 사도로서, 방송과 교육 잡지의 편집인으로서, 그가 쌓아 온 크고 작은 많은 업적이 47세로 작고하신 그를 다시 한번 살피게 된다.

이에 따라 7월 17일 오전 10시 본교 강당에서는 천여 조객의 흐느낌 속에서 고별 예배가 진행되었다. 유가족 등 7인에 의해 꽃으로 덮인 고인의 유해 위에 촛불이 켜짐으로써 시작된 본 예배는 이귀선 목사의 사회로, 기도에는 강신명 목사, 설교에는 한경직 목사님께서 맡아 주셨다.

고별 예배 후 고 황광은 목사님의 유해는 퇴계원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유가족으로는 부인 김유선 여사, 아들 승균, 승국, 딸 진숙, 은숙, 형 태은, 동생 정은, 종은(在美) 씨 등이 있다. 

무엇이 황 목사의 죽음을 그렇게 슬퍼하게 했는가? 그의 병상 노트의 한 구절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 들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는 그처럼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적인 정 때문일까? 아니면 무엇 때문일까? 생전에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안성진(安成鎭) 목사는 고별예배 때 다음과 같은 추도사로 그의 인품을 기리었다.

사랑하는 친구 황 형! 사람이 그렇게도 선할 수 있을까? 사람이 그렇게도 순할 수 있을까? 그저 착하게만 굴고, 그저 순하게만 살더니! 사랑하는 친구 황 형! 사람이 그렇게도 남만 위해 살다니! 형은 그 많은 열심을 남만 위해 다 쏟았지! 그 멋진 재능을, 그 숱한 능력을 모두 남만 퍼 주고 살았지! 오오, 사랑하는 친구 황 형! 사람이 어쩌면 그리 화해의 사람일까? 어쩌면 그리 악마라도 사랑할까? 그저 무슨 일에나, 그저 누구에게나 “그럼 어떡해!” “내가 도와야지 그럼 뭘해? 내가 있지 않아?”하며 덥석덥석 아픈 가시밭길을, 그 힘든 수렁길을 그냥 헤매 나가던 착한 암소같은 황 형! 오오, 사랑하는 친구 황 형!

사람이 어쩌면 그리 불쌍한 아이를 사랑할까? 청소년을 사랑할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불쌍한 아이들의 운동을 형은 소나기처럼 일을 했소…. 글로, 책으로, 동화로, 설교로, 방송으로, 연극으로, 그래도 성차지 않아 한국 보이스타운을, 대한 소년단을, 그리고 또 KA에서, KY에서, TV에서, 아동 영화에서, 무진장의 일을 무진장의 능력으로, 성직을 지닌 목사로서 모두 해내던 우리 황 형! 형의 몸이 쇳돌인들 어이 견뎠으리오! 오오, 존엄한 황 형!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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