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향기]노엘음향산업 대표 김필순 장로(용천노회 염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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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사업, 교회… 평탄하게 지나온 지난날에 감사

어렵게 세운 교회 갈등하는 모습 주변에서 볼 때 안타까워

 

지난 3년. 코로나19로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수련회나 구역모임은 물론 가족, 친구들과의 사소한 만남들도 불가했던 시기, 많은 사람들의 생업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오히려 김필순 장로의 음향 사업은 일이 늘었다. 대면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면서 영상과 음향 시설을 필요로 하는 교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던 적도 있었어요. 코로나로 인해 영상 쪽 수요가 많아진 셈이지요. 덕분에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지만 저 하나 어렵지 않다고 맘 편할 일은 아니지요. 많은 교회와 교인, 이웃들이 힘들었으니까요.”
용천노회 염광교회 김필순 장로는 이 업에 1974년부터 종사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세운상가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고 군대 제대 후 일을 이어나가 1986년부터는 직접 사업을 했다. 교회에 설치돼 있는 방송 영상 음향 시설은 대부분 김필순 장로의 노엘음향에서 맡아 설치 공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 음향 업계에서는 선도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사업적 성공보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것이 김 장로에게는 더 큰 소득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제가 일하는 곳 옆에 있는 사업장 사장님께서 저를 전도하셨어요. 그때는 신앙심이 있다기보다는 (교회에) 그저 왔다갔다하다가, 군대에 가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지요. 원래 술 담배를 안 했기 때문에 군대에서 잘 지내려면 교회에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믿음의 동료들을 만나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됐어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 덕분에 한 주 동안 평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고 33개월이 넘는 군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대 후 김 장로가 취직한 곳은 ‘은혜소리사’. 사장님은 이태원순복음교회 박종세 장로였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장님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김 장로는 일터에서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지금까지 김 장로는 매달 첫 번째 월요일마다 사업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사장님이었던 박종세 장로의 신앙관이 그 계기가 됐다고 한다.
제대 후 김 장로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찾았고 그곳이 염광교회였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섬기는 교회다. 당시 염광교회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 120여 명 정도가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였다. 비록 크고 화려한 예배당은 아니었지만 김 장로가 서리집사, 안수집사, 그리고 장로로 시무하는 지금까지도 교회는 참 평안하다.
“저희 집안에서는 제가 가장 먼저 예수를 믿었지요. 이후로 조카들까지 모두 예수를 믿게 됐어요. 지난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평탄하게 살아왔어요. 가정에서나 사업이나, 특별히 어렵고 힘들었던 적이 거의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교회도 처음부터 참 좋은 염광교회를 만나서 지금까지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김필순 장로는 염광교회 최윤해 원로목사와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최윤해 목사가 1979년 4월 부임했고 같은 해 김 장로도 염광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예배당은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만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뜨거웠다.
“최 목사님께서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어요. 언젠가 제게 장로 임직을 해주지 못하고 은퇴하게 돼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구요. 최 목사님께서는 파킨슨병으로 조기은퇴를 하셨거든요. 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목사님께는 마음이 쓰이셨던 모양이에요. 목사님께 ‘하나님 뜻입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한번은 예배당을 옮겨야 할 상황이 되어 인근 공장 부지를 사서 그곳을 예배당으로 리모델링을 했어요. 그런데 화장실이 부족해서 저희가 임시로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구청에서 나와 불법이라며 철거를 한 거예요. 최 목사님께서 그날 예배에서 제게 대표기도를 맡기셨는데 한쪽에서 교회가 철거되는 것이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기도하면서 눈물이 흘렀던 기억이 나네요.”
김 장로는 교회 화장실 철거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후 염광교회는 두 번의 건축공사를 실시해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 예배당을 건축하는 데에는 1년이 채 걸리질 않았다고 한다. 2014년 3월 시작된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돼 그해 12월에 끝났다. 다음해에 헌당도 마쳤다.
“지금 예배당을 건축할 때 돈도 밀리지 않고 (건축공사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어요. 중간에 암반이 나와서 지연될 뻔한 적도 있어 전 교인이 함께 기도하기도 했는데 그 문제도 쉽게 잘 처리됐어요. 이번 건축이 어떻게 시작됐냐면, 예전에 저희 교회에 예배당이 지하 2층에 있었어요. 저희 교회에 젊어서부터 나오시며 열심히 봉사하시던 성도님들이 어느새 60-70대가 되셨는데 어느 주일날 예배안내를 하면서 그분들이 예배드리려 지하 예배당으로 걸어 내려가시는 모습을 보니 너무 힘들어 보이는 거예요. 정말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목사님께 그분들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자고 제안드렸고 견적을 받아보니 십몇억 원이 나왔어요. 당회원들이 그 정도 비용이면 차라리 교회를 새로 건축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설계를 하고 현재 교회가 건축된 거예요. 처음 건축을 계획하고 헌금을 작정할 때도 우리가 목표로 했던 금액보다 130%가 모였어요. 참 감사하지요. 지금도 우리 목사님께서는 ‘김필순 장로 아니었으면 교회 건축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저는 어렵고 힘든 분들을 위해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길을 열어주신다고 지금도 믿고 있어요.”
염광교회는 지난 3년 코로나 기간 중에도 교회 전체 예산 가운데 수입이 지출보다 많았다고 한다. 덕분에 남아공에 염광교회를 건축했다.
염광교회는 각 위원회마다 1년 예산을 결재하고 집행하는 데 위원장 권한으로 한다. 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로들을 교회가 신뢰하기 때문이다. 대면제직회를 두 달에 한 번씩 진행해 원활한 소통 과정을 거친다. 염광교회에서 특별한 부분은 김필순 장로의 대외 연합활동비를 교회에서 지원한다는 것이다. 보통 목사들의 활동비를 교회가 지급하는 곳은 많지만 장로들은 대부분 자비로 활동한다.
“전두호 담임목사님께서는 제게 외부 연합 활동을 잘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세요. 그래서 제가 더 열심히 하는 겁니다. 또 교회에서 활동비를 지원해 주세요. 목사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는 거지요. 저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저희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목사가 노회나 총회에서 활동하면 그 비용을 교회에서 지원해주지 않느냐면서, 장로가 연합활동을 하는 것도 교회가 대줘야 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예 교회 예산에 책정을 해놓으셨어요. 참 감사한 일이지요.”
김필순 장로는 용천노회 남선교회, 남선교회 이북협의회, 용천노회 장로회 등에서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이북지역 장로협의회 수석, 평대원 22기 회장, 남선교회전국연합회와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다. 총회에서는 사회봉사부와 군경교정선교부에서 일했다.
“제가 또 감사한 것은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겁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 마음을 갖고 일을 하다보면 타협하지 않고 쉽게 넘어가지 않다보니 때론 눈총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인정을 해주세요. 제가 손해를 보는 듯 세상을 살아야지 이익을 보려고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제가 교회나 연합회 활동을 하는데 아내가 저를 굉장히 많이 도와줘요. 아내 도움이 없이는 제가 이 일들을 다 할 수가 없지요.”
김필순 장로는 김숙희 권사와 슬하에 명신, 홍준 아들 둘을 두었다. 최근 맏아들이 염광교회 항존직 선거에서 첫 번째 안수집사가 됐다. 두 아들 모두 출가해 염광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린다.
김필순 장로는 어렵게 세운 교회가 갈등으로 싸우고 갈라지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무척 안타깝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위로하고 조언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총회나 노회에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예전에는 누가 무슨 잘못을 하거나 그러면 그 사람더러 교회에 나가라고 했어요. 교회에 가서 바르고 착하게 살라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안 좋게 봐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너무 많잖아요. 갈등 해결에 전문성을 가진 분들이 모여 중재해 주는 기관이나 시스템이 생기면 좋겠어요.”
평생 교회에서나 삶에서 평안을 누려왔다고 김 장로는 고백한다. 그가 누리는 평안이 노엘의 메아리로 그의 주변과 한국교회에 널리 퍼지면 좋겠다.
/한지은 기자

 

 

 

 

 

▲김필순 장로 내외와 두 아들의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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