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35) 알브레히트 뒤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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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는 북유럽 르네상스에서 불꽃같은 존재였다. 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를 중심하여 발전했는데 그가 나오기 전까지 독일은 미술계에서 뒷전이었다. 뒤러는 드로잉과 유화도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으며, 특히 자화상을 예술 양식으로 확립하였다. 또한 작품에 서명을 남기며 화가의 지위를 수공업자가 아닌 예술가로 격상시켰다. 피렌체의 미술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의 생애>라는 책에서 뒤러를 “진실로 위대한 화가이자 가장 아름다운 동판화의 창작자”라고 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켈란젤로도 제일 닮고 싶은 사람으로 뒤러를 꼽았다. 

뒤러의 아버지 알브레히트 뒤러는 헝가리에서 직업을 구하려고 17세에 신성 로마제국의 뉘른베르크로 왔다. 그는 금은 세공을 배웠고 시민권도 얻었다. 뒤러는 1471년 5월 21일 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아들 중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받았다. 뉘른베르크는 당시 제국 최대 도시인 쾰른 다음으로 인문주의, 인쇄, 항해와 천문 도구를 개발하는 과학 기술, 무역이 발달한 국제 도시였다. 

뒤러는 13세부터 아버지에게 금세공을 배웠다. 이때 익힌 정밀하고 섬세한 금속세공기법은 그의 동판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인정하여 15세 때 화가이며 삽화가인 미하엘 볼게무트의 도제로 보냈다. 뒤러는 볼게무트의 화실에서 4년여 목판화, 제단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작품을 보며 그 기법을 배웠다. 

뒤러는 19세에 도제 수업을 마치고 독일과 네덜란드, 북부 프랑스, 스위스로 여행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며 공부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했다. 뒤러는 돈이 없었다. 그때 미술을 배우려는 친구 프란츠가 있었다. 고민 끝에 프란츠가 뒤러에게 “내가 먼저 일을 해서 너를 도와줄 터이니 나중에 네가 나를 도와라. 그러면 나도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안으로 뒤러가 먼저 공부했다. 뒤러가 공부를 마친 후 프란츠를 찾아갔다. 그가 일하는 곳에 들어가는데 친구의 기도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이시여, 내 친구 뒤러는 공부해서 훌륭한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공부할 차례인데 내 손은 뒤틀려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이 기도 소리를 들은 뒤러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펜을 꺼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다. 그것이 <기도하는 손>이다.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다.” 영국의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는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하라.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할 수 없다고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때 이미 당신은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기도하는 손>은 하나님께 전하는 인간의 마음을 손의 형태로 나타낸 작품이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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