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하워드패인(Howard Payne) 대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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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대학에서 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2년을 지냈다. 집은 허술하지만 넓고 좋았다, 뒤뜰에는 피칸 나무가 우거지고 뜰에는 붓꽃이 보라색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내는 꽃을 좋아해서 그 뜰을 가꾸는 일을 좋아했다. 애들은 다 나를 따라 이사했다. 막내가 얼마나 많이 학교를 옮겼는지 모른다. 미시간에서 초등학교 댈러스로 와서 어빙의 초등학교, 덴턴의 김 박사 집으로 옮겨 또 다른 초등학교, 6개월 뒤 대학촌으로 옮겨 덴턴 중학교, 이제 또 브라운우드로 옮겨 또 다른 중학교다. 그런데 불평을 하지 않았다. 너무 잘 순종하는 아들이었다. 덴턴에서는 그렇게 많이 옮겨 다녔는데도 수학 경시대회에 늘 뽑혀 다녔고 학급에서는 우수학생(Honor Student)으로 부모도 불려가서 선서식에 참여했었다. 브라운우드에서는 매 주일 3시간 가까운 댈러스 교회까지 참석하느라 베개를 가지고 아침 일찍부터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11시 예배에 참석하려면 집에서 8시에 출발해야 했는데 아침 먹을 시간도 없어 도넛과 커피를 사서 차에 들고 들어가 운전하며 갔었다. 오후에 돌아올 때는 졸리기도 해서 찬송도 부르고 성경 암송 카드로 성경 암송도 하고, 또 막내는 가끔 부모가 견해차로 큰 소리를 내는 것도 다 보고 지냈다. 왜 막내는 맘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부모를 따라다니며 이렇게 살아야 했는가? 내가 늘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한 애다. 한인 교회를 안 나가고 지낼 수도 있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대학 봉급으로는 한국에 송금하며 살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우리는 댈러스 교회에 참석해 그곳에서 일감을 가져와 여기서 아내가 봉재 일을 해야 했다. 

댈러스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딸은 이곳으로 대학을 옮겼으나 수학과가 마음에 안 든 것 같았다. 미술을 부전공으로 택해 공부하고 있었으나 한 학기를 마치고 다시 따로 학교 촌에 집을 얻어 덴턴으로 떠났다. 

교회에서는 내가 세계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일 것이라고 나이 많은 손 권사님과 함께 송 목사가 심방을 왔다. 손 권사는 이렇게 먼 곳에서 교회에 운전하고 온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차도 중고차인데 오가는 길에 멈춰 서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 뒤부터는 매일 우리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송 목사는 내가 이 학교에 취직되어 오게 된 경우를 듣고 정말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신 일이라고 한번 교회에서 간증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는 사양하였다. 예수를 믿으면 언제나 이런 행운이 온다고 그 이유로 하나님을 믿게 되면 기복신앙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 데리고 온 두 부인이 사는 미국 가정이 있었는데 그 부인들은 한국 동족이 대학교수로 왔다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몰랐다. 집에 놀러와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가끔 파마도 해주고, 또 우리가 교회에 나갈 때는 따라와 댈러스에서 쇼핑도 하곤 했으나 그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어떨 때는 토요일에 떠나 송 목사 집에서 자며 교회 나가는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해 11월에 교회에서 장로를 세우는 일이 있었다. 내게도 장로 추천이 있었으나 나는 굳이 사양하였다. 이렇게 먼 곳에서 다니는 사람은 교회를 잘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같이 오셨던 손 권사의 큰아들과 이철남 장로 두 분이 피택되었다. 다음 해 성전 건축 및 교육관 확장 공사를 마치고 또 장로, 권사, 안수집사를 뽑았는데 나는 먼 곳에 있으면서 한 번도 교회에 빠지는 일이 없으며 오히려 30분 먼저 교회에 나와 있는 사람이라고 장로로 뽑아 주어서 그해 박사 학위를 받기 일주일 전 12월 12일 댈러스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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