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도쿠도미’의 살생부와 협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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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박 또박 박아, 말을 하는 도쿠도미의 눈에는 무서운 살기가 번득였다. “춘원! 천천히 끝까지 다 읽어봐! 아마 큰 결심이 올거야!” 도쿠도미는 콧등 아래로 내려앉은 안경을 손으로 밀어 올리며 속삭이듯 힘주어 말했다. 살생부(殺生簿)! 지금 도쿠도미가 말하는 ‘살생부’라는 것은 앞으로 조선의 유망한 인재들을 뿌리채 뽑기 위해, 하나씩, 둘씩 모조리 제거한다는 살생부 블랙리스트를 말하는 것이다.

아주 세부적으로 작성된, 참으로 무서운 계획서였다. 읽어 내려가는 춘원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것은 진짜 무서운 음모서며, 하늘 아래 이것보다 더 잔혹할 블랙리스트가 더 있단 말인가. 소름이 끼쳤다. 협박을 하고 볼 일을 다 본, 도쿠도미는 마지막으로 춘원에게 이렇게 최후 통첩처럼 내뱉고는 빠른 동작으로 소장 방을 빠져 나갔다.

“춘원! 빨리 병보석을 신청해! 춘원은 다 좋게 플리도록 내가 만들어 놨어! 석방되면 바로 행동으로 보여야 해. 그러면 자네가 그토록 아끼는 조선의 많은 인재들이 모두 구명을 받게 된다는 말일세. 민족말살만은 피하게 되는 것이지. 후일을 기해, 씨를 말리는 것만은 피해야 되지 않겠나? 내가 지금 자네를 회유하는 작전으로 보지 말아 주게. 형무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 나가는 것은, 앞으로 곧 자네의 최대의 공로가 될테니까. 알아서 해라. 자네의 뜻대로.”

정말 도쿠도미가 춘원에게 던지는 이 마지막 협박성 최후 통첩은, 결코 겁만 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춘원은 며칠간 몹시 혼란스러웠다. “이곳 형무소에서 나가더라도 도산 안창호 선생과 동지들이 함께 풀려 나가야지. 내 혼자는 안 나가! 어림도 없지.”

춘원은 창문에서 서서히 사라지는도쿠도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쿠도미가 다녀간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넘었다. 이후, 춘원은 몇일 몇날 밤잠도 설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 조선 인재들은 제대로 남아 있질 못하고 모두 서서히 제거될 것만 같았다. 씨가 마르면 후일이 와도 누가 이 나라 조선을 이끌어 갈 것인가. 이렇게 되면 조선의 앞날은 정말 희망이 없어 보였다. 깊은 시름에 잠겨있는 춘원의 충혈된 눈에는 망국의 한 같은 것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총체적인 국제정세를 들여다봐도 대한 독립의 기미는 요원한 것 같고 해방은 꿈같은 소리로만 들렸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끌던 춘원이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창밖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형은 과감히 돌아섰나?” 운허는 친구 춘원을 응시하며 물었다. 춘원은 운허의 묻는 말에는 대답않고 넋두리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게 웬 날벼락인가. 어느 날 이 땅에 해방이 도둑같이 찾아왔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 이 나라 해방은 내 판단 중, 가장 실패된 판단이 되고 말았어. 그때만 해도 이 나라 앞날은 정말 예측 불허였어. 한치도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조선의 유능한 인재 말살 정책이 조선총독부의 주요 사업으로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어. 그것은 나만의 단독 희생뿐이었다. 내 한 몸을 죽이는 일이었다. 내가 나를 죽이는 길은 놈들의 ‘개(犬)’가 되어 주는 길이었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배신자, 친일 변절자, 개로 볼테지만… 그때 내 마음의 갈등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내가 언젠가 말했었지? 내게 또 다시 이런 시련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그때처럼 일본 놈의 개(犬)가 될 것이라고. 나 춘원은 그 누구보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사랑해. 그리고 내 가족도.”

춘원은 목이 타는지 벌떡 일어나 물병의 물을 잔에 가득 채워, 한꺼번에 다 마셔 버린다. 운허는 손에 든 염주알을 좀더 빠르게 돌리면서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조용히 계속 듣고만 있었다. 춘원은 하던 말을 다시 이어갔다.

“내가 오늘 처음으로 자네에게 내 속마음의 비밀과 진실을 다 털어 놓는구먼. 지금까지 어디서 구차한 변명같은 말을, 오늘처럼 한 적은 없었네. 정말 지지리 못난, 이러한 구차한 변명은 죽기보다 더 싫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한 가지 크게 잘못한 것이 하나 있긴 해.”

여기까지 말하고 춘원은 입을 꼭 다물어 버린 채, 도로 바닥에 벌렁 누워 버린다. 누워서 천장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까지 눈을 감고 계속 염주알을 돌리며 듣고만 있던 운허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눈을 번쩍 뜨며 말을 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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