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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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9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10절에는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아담이 대답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우리의 양심을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억지로 우리의 귀를 막아도 소용없고 비록 이를 듣지 않으려고 장소를 옮긴다고 하여도, 나만은 분명하게 들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나를 벌주기보다는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는 자비의 소리라 믿고 싶다. 다만 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들리는 성령의 소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회개할 기회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은척하며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게다가 때로는 미욱한 인간은 자신의 우둔한 두뇌와 알량한 지식을 믿고 감히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139장에 자복하는 노래에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7∼10)’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음을 자복하듯 해변의 모래알까지도 헤아리시는 여호와를 제대로 믿고 이해하는 설명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생활이 더욱 윤택해지고 편리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때에 우리가 접하는 음성은 선을 가장한 마귀의 음성도 있고, 더 나아가 우리를 직접 유혹하는 마귀의 음성도 있으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런 유혹에 빠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이런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듣지 못한 것처럼 처신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왕왕 자신이 분명하게 잘못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너무도 뻔뻔하게 부정하면서 ‘자신은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발견하면서 ‘과연 이 세상의 정의와 공정이 어디 있는가’고 혀를 차기도 한다. 더욱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존경을 받아야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더더욱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근래에 장례식 문상을 다니면서 느낀 점이 많다. 나도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기에 언젠가는 있을 나의 장례식을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잣대로 보람 있게 살다가 유가족의 애틋한 사랑 속에 따뜻한 영결식을 치르며  하늘나라로 가는 영혼을 보면서는 편안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라하게 장례식을 치를 수밖에 없어 조문객이 별로 없는 쓸쓸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면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네, 여기 쓸쓸한 장례식에 와서, 슬픔에 잠긴 유족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겠기에 조문에는 신경을 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산다. 그 부르시는 음성은 칭찬도 있고 때로는 회개를 권유하시는 때도 그리고 질책하시는 경우도 있으니, 어떻게 대응하는 것은 우리의 소임이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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