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19)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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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으로 훈련받던 무렵 ①

예술에 천부적인 재질 가져

인상 좋아 여자동인들에 인기

프랜시스처럼 살겠다고 다짐

‘녹십자’ 발행에 사원노릇 충실

그 보헤미안들의 연습 장소는 황광은이 자취 생활을 하고 있는 서울교회였다. 그 착하기만 한 개구쟁이 젊은이들이 몰려들면, 광은은 그 특유한 미소를 지으며 불평 한 마디 없이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기에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황광은이 보헤미안들의 뒷바라지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연기에도 남달리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어 거의 주연이나 다를 바 없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원예술좌’에서는 윤금성(尹琴聲)이 각본을 쓴 ‘모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여호수아 역을 맡았었고, ‘예술무대’에서는 이보라가 각본을 쓴 ‘에스더’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하만 역을 맡았다.

예술에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태어난 데다 그 인상까지 좋아서 광은은 동인들, 특히 여자 동인들한테 무척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모임에서 그가 누구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어느 분의 증언에 의하면 광은이 어느 여자 배역한테 프러포즈를 받았고, 광은도 그 상대자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상대방이 알 수 있을 만큼 내색했던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은은 열여덟 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장가가라는 독촉을 받았으나, 계속 그 말을 거절해 오던 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성 프랜시스였고, 그 역시 프랜시스처럼 살겠다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 무렵에 광은은 프랜시스처럼 독신으로 일생을 지나겠다는 생각과, 또 프랜시스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겠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단단히 다짐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있었다. 한참 무대 연습에 바쁘던 어느 수요일날, 광은은 느닷없이 이보라에게 함께 공덕동교회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왜 갑자기 공덕동교회야?”

“오늘 저녁예배 때 가서 특송을 하기로 했거든.”

“이렇게 비가 오는데?”

“그러니까 함께 가자고 부탁하는 게 아니겠어?”

부탁하는 광은의 표정이 하도 착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해서 이보라는 말없이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 당시 공덕동교회 담임은 최은관 목사였다. 그리고 그 최 목사님의 가족 가운데 한 분이 ‘원예술좌’의 동인으로 연습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오간 끝에 광은이 특송을 하기로 했는지 모른다.

“황광은이가 노래 부르는 것은 처음 보았는데 어떻게나 잘 부르던지… 성악가 뺨치게 부르더군요. 비오는 날 워커 군화를 신고 ‘날로 더욱 귀하다’ 하고 노래 부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보라 씨의 말이다.

그 해 ‘모세’와 ‘에스더’에서 광은은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서울시공관에서 공연되었던 ‘모세’는 팬들의 요청에 의해 HLKA의 전차를 타고 전국에 중계 방송되었다.

‘녹십자’ 시절

그 무렵의 생활상을 황광은은 ‘녹십자 시절’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적어 놓고 있다.

‘녹십자’ 시절, 그것은 이종환 시절을 의미한다. 학형 이종환 씨가 새파란 젊은 시절에 꿈꾸던 문화 사업에 손을 대게 된 것은 해방의 격동도 잠시 가시려는 1946년 가을, 그러니까 피난민 구호 사업에 동분서주하던 기청(基靑) 활동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일본 사람이 버리고 간 예배당의 하층을 또 빌려 사는 형편이지만, 조그만 창문에 푸른 커텐을 늘이고 ‘녹색의 전당’이라고 명명하던 낭만이 ‘녹십자’쯤 발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만 해도 대기만성(大器晩成)을 기다린 것은 아닐 텐데 모든 점에서 미숙했고, 더구나 이 형이 편력하는 연애 역정엔 매사에 반발을 일으킨 애송이였지만, ‘녹십자’ 발행에는 자금 조달에서 원고 청탁에 이르는 이른바 사원 노릇을 충실히 한 셈이 된다. 종환 형이나 나는 다 같이 신학교 2학년의 학생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는 나보다 훨씬 원숙한 학부형 격이었고, 또 한국 최초(?)의 기독교 종합잡지를 발간한 그 역량에는 매사에 감탄해 그의 심부름이라면 세수물을 떠 바치기도 주저하지 않았던 나였던 것 같다.

사실 그가 시작한 <새벗>이 오늘 위치에까지 온 사실이라든가, 여성 잡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여원>의 파격적인 편집 노선은 그가 밤을 새워 원고 뭉치를 안고 다니던 창간 시절의 혈투가 없었던들 하고 생각하면 그는 잡지를 위해 태어났던 사람 같다.

각설하고 녹십자는 그때의 경향인 창간 겸 종간호는 면했지만 세 번을 가까스로 내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힘으로 잡지를 만들어보자고 생각은 하면서도 손을 대지 못하던 때의 일이라 웃지 못할 일화가 많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돈 없이 책을 만드는 일이라서 만사가 지지부진이었고, 그러니까 잡지를 따로 하고 생활을 따로 하고가 아니라 먹을 것이 생기면 잡지는 진척이 되고 잡지가 정지되면 먹을 것도 떨어진 상태란 것이다. 

결국 교회 재건, 사회 정화, 문화의 건설, 그리고 하고 싶던, 쓰고 싶던 글을 썼다는 데서 희열을 감싸안고 뒹굴던 녹색의 전당도 돌리기는 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잡지값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고, 이 형은 남산 굴다리 밑으로 노천 사무실을 차리고 이사를 하게 되고야 말았다.

단 한 권 남은 이와나미(岩波)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팔아 차를 나누던 다방이 명동은 명동인데 어느 집이었던지는 생각나지 않으나, 그때의 심경으로는 술을 한 잔씩 나누자는 심정이었을 터인데, 내가 술을 못한다고 해서 찻집으로 가서 마주 앉았던 것 같다. 긴 밤에 우리들은 교회를 상대로는 문화 사업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면 그 ‘녹십자’란 녹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 여기 L이란 문학도가 있었다고 하자.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백아에 녹색 지붕을 씌운 E여대의 녹색 스커트를 입은 한 여성을 사랑했다고 하자. 아니 그 학생이 오히려 문학을 좋아한 나머지 L군을 사랑했다고 하자. 그들은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의 사랑을 문학에 담아 보내고 보내왔다고 하자. 그러던 어느 날 푸른 스커트의 여학사는 졸업과 함께 명문 출신의 고문 패스 법학도와 결혼을 하게 되고, L이란 청년은 기나긴 마지막 사연의 편지를 앞에 놓고 울었다고 하자.

그러한 L은 녹색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마 그런 사연의 사념에 사로잡힌 청년은 그가 비록 법복에 몸을 감싼 법학자가 되었더라도 그 어느 부분에 녹색 실을 지닐 것이 아닌가?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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