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47) 알브레히트 뒤러 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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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로 진정한 예술가 거듭나

‘북유럽의 레오나르도’라 불릴만큼 거장 인정받음

목판화인 <묵시록의 네 기사>는 동판화에 버금가는 섬세한 선이 놀랍다. 뒤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섬세한 기법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목판화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왔다. 

동판화는 금속 조각용 끌을 사용해 동판에 작가의 생각을 오목 선으로 형상화하므로 중세의 금은 세공사로부터 기법을 계승했다. 뒤러를 통해 동판화는 중세적인 장인에서 격상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추구한 과학성이 담긴 예술작품으로 영역을 확보했다.

뒤러는 대량 복제해서 팔았다. 그는 뉘른베르크, 금 세공가인 부모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뒤러는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 자, 렘브란트와 함께 서양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로 평가받았다.

당시 미술가들은 종교, 정치 귀족들에 의해 작품 활동을 했다. 뒤러도 한때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화가로 있었다. 종교화를 그리지 않으면 화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시대에 예술가들은 신앙적으로 종교개혁을 지지하면서도 자신들의 예술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종교개혁자들을 따를 수 없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그림이나 조각품 그리고 건축물에 대한 우상적 요소를 배격했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뒤러는 판화를 복제했으며 싼 값으로 팔았다. 얼마든지 많은 수량으로 복제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부유한 미술가요 공방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로 평가받기 위해 자화상을 그릴 때도 명품으로 그렸고 예술가는 학자요, 이탈리아에서처럼 높은 평가를 받아야 된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뒤러는 고객의 주문을 받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그림에 드러냈다. 1513년에 완성한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는 동판화 기법으로 만들어 낸 최고에 이르렀다. 그림 속의 기사는 위험한 여행길에서도 의연하게 전진하고 있다. 죽음의 신이 나타나도 동요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굳건한 믿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그는 창작자 개인의 의식을 표현하는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났다. 

뒤러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미술사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미술도 교양 학문에 포함된다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관점을 취했던 뒤러는 미술가를 신사, 인본주의 학자로 인정했다. 그는 지적인 호기심을 조금씩 계발해 나간 결과, 생애 동안 실로 광범위한 분야를 섭렵하고 다양한 기술에 통달했다. 그는 북유럽에 보급된 자신의 목판화와 동판화 작품을 통해서 16세기 미술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은 1100점이 넘는 소묘, 34점의 수채화, 108점의 동판화, 246점의 목판화, 188점의 회화 등 무척 방대하다. 독일인들은 1500년 무렵을 <뒤러의 시대>라고 일컬음으로서 일개 화가의 이름을 황금기와 동일시할 만큼 떠받들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이탈리아의 거장들이 예술의 금자탑을 쌓아올리던 시절 북유럽의 거장으로 불리며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뒤러는 <북유럽의 레오나르도>라 불렸다. 뒤러는 사실주의라는 북유럽 미술의 특성과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여행에서 익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혁신적인 요소를 결합시켜 북유럽에 전도한 화가로 평가된다. 미술은 정확한 관찰을 통해 그려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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