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눈높이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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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착하고 충성’되기를 원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악하고 게으르기’를 반복한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며, 우리의 무수한 허물을 대속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대속의 사랑을 나누어야 할 그리스도인이다. 겨울과 성탄절이 다가오면 ‘상하고 꺼져가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중 노숙인들이 생각난다. 약자들의 인권을 돌아볼 때이다.

인권주일이다. 우리는 ‘천부인권’이라는, 창세기 1:26-28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거룩하고 위대한’ 인권을 받아들인다. 에덴에서의 선악과 범죄 후로 신권과 인권이 갈등하는 세상살이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온통 무한 경쟁과 무한 사유로 갈등하는 시대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위대한 인권을 회복한 성도들은 무한 협력(롬 8:28)과 무한 공유(마 10:8)의 삶을 회복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무한히 화목케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떠나서, 무한히 분열케 만드는 사탄의 선악과와 돈, 명예, 권력에 취해, 무한히 휘돌림을 당하는 나 자신과 이웃들이 안타깝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중요도로 가르치셨다(마 22:37-40).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 신권과 인권은 첫째와 둘째의 순서는 있으나 같다고 볼 수 있다. 십자가의 사랑을 수직인 하나님 사랑의 신권과 수평인 이웃사랑의 인권으로 표현해 본다. 

여러 해 전에 선교사로 인도 시골에 머물면서 힌두교인, 이슬람교인, 기독교인을 동시적으로 접하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각 종교의 교리와 생활방식들은 나름의 장단점들이 많았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비교해보았다. 힌두교와 불교는 ‘나부터’ 사랑, 이슬람교는 ‘우리끼리’ 사랑, 기독교는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는 교리와 생활을 강조했다.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만이 온전한 사랑이자, 신권과 인권의 최고의 본이 됨을 알 수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은 노숙인이라고 여긴다. 인권주일에, 영혼육의 중환자들인 노숙인의 인권을 살펴본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악하고 게으른’ 죄의 자업자득으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이분들과 함께 서울역에서 먹고 자고 싸우면서 가까이 지낼수록, ‘착하고 충성됐던’ 이분들이 ‘악하고 게으른’ 남들과 자신들의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과 남의 죄악으로 인한 삶의 고통을 잊으려고 술에 의지해서 ‘재앙, 근심, 분쟁, 원망, 상처, 붉은 눈’(잠 23:29)으로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을 욕하곤 한다. 능력주의와 승자독식의 시대를 살면서 억울하고 고난받는 종(사 53)의 모습도 보인다. 도피성이 된 서울역에서 상처를 핥으며 치료하는 노숙인도 보게 되다. 영혼육의 종합적인 중증 환자로서 장기적인 종합치료, 눈높이 인권 회복이 시급하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38년 된 왜곡된 병자를 온전히 고쳐 주신 후, 다음에 만나서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고 하셨다. 우리는 이분들의 필요를 절반도 채워주지 않으면서 ‘홀로서기’를 재촉한다. 무한경쟁의 인생 전쟁터로 다시 나가라고 요구받을수록 병자인 이들은 괴롭다. 간접적으로 인권탄압을 당하는 것이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같은 회개를 반복한다. 38년, 20년, 10년, 5년, 1년 등 다양한 노숙인들을 만난다. 이들의 대부분은 ‘나를 못에 넣어주는’ 가족, 이웃, 친구, 국가 등 도움이 없어서 억울하게 망했다며 술과 담배 등으로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분풀이를 한다. 심신도 관계도 망가지고, 악순환의 술친구만 남는다. 그저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린다. 매일 흑암의 인생들이 매일 성탄의 메시아 예수사랑을 기다린다. 말구유의 아기 예수님께 하듯이, 땅끝의 끝날까지 모든 이웃에게 좀 더 겸손히, 눈높이 인권의 눈높이 서로사랑으로 ‘주께 하듯이’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돌리기를 기도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희운 목사

<예수맘행복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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