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24)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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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육원의 교육부장 ②

원생들 정서적으로 키우려 애써

노동이 신성하다는 것도 가르쳐

박윤삼, 최영일 목사 등 보육원 찾아

그를 시샘하는 사람들에 대해 고민

“그때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바로 뒷날 황광은 형님의 사모님이 되신 김유선 선생님이었고, 그 당시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일간으로 발행되던 벽신문에 연재되던 형님의 연재 동화였습니다.”

김용호 씨의 말에 의하면 그 연재 동화는 동물의 나라를 소재로 했는데, 어린 자기네가 읽어도 그것이 인간 세상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세히는 기억 못하지만 황광은 목사의 최후작이 된 동화 ‘개미나라 만세’ 비슷한 것이었다고 했다.

개미나라에 아주 예쁘게 생긴 왕자가 있었단다. 그런데 아버지 왕이 돌아가신 후에는 이 예쁜 왕자가 곧 왕이 될 것이기 때문에 왕자를 좋아하는 개미와 왕자를 없애 버리려는 개미로 나누어졌다.

왕자를 사랑하는 건 누구보다도 용감한 베베르크 장군이구, 왕자를 없애 버리고 제가 왕이 되려는 건 마음이 시커멓구 몸집이 뚱뚱한 캉캉 총리대신이었지.

캉캉은 베베르크를 혼내 주려고 베 장군을 두더쥐 나라와의 싸움에 내보냈지. 어미 개미보다도 몇 갑절 큰 두더지들과 싸우다가 죽어 버리라고 말야.

그런데 그 베베르크 장군이 두더쥐를 모두 물리치고서는 이기고 돌아오게 됐으니 어쩐다 말이지?…

이런 식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에 모두는 그 다음날이 오기를 몹시도 기다렸다고 한다.

“형님은 정말 문학적인 소질이 너무나 많았던 청년이었습니다.”

김용호 씨의 말이다. 실상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황광은이 한국보육원 원생들을 정서적으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다. 기회만 있으면 원생들의 글을 지면에 발표해 주려고 애썼다.

 

“바람이 불던 날…”

그 무렵 이희숙이란 원생이 쓴 ‘운명’이란 글이 있다. 누렇게 퇴색된 36절 크기의 갱지에는 연필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바람이 불던 날 / 나는 너를 믿었었다 / 그러나 흐린 하늘에는 /

검은 구름이 맺혀 / 안타까운 신념만이 스치고 / 지나는 밤 / 애달픈 온 세상엔 /

세기의 철학이 넘쳐 / 운명! / 그것은 굳센 명령이었다.

 

그러나 황광은은 아동시 어린이들을 정서적으로만 키운 것은 아니었다. 자립 정신을 키워 주기 위해 노동이 신성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떳떳한 민주 시민이 되게 하기 위해 소년시장을 선출할 때는 공정한 투표로 결정하게 했다. 김유선 여사는 소년시에서의 선거에 얽힌 에피소드 한 토막을 기억하고 있다.

소년시장 후보로 정훈이와 창훈이가 출마했다. 선거 관리위원들 중에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정훈이를 더 좋아했고, 어떤 아이들은 창훈이를 더 좋아했다. 선거를 하기 위해 한 아이씩 한 아이씩 선거 관리위원 앞에 다가섰다. 기표를 할 수 없는 아주 어린아이들은 구두로 물어 대신 기표해 주기도 했다.

선거 관리위원이 어린아이에게 “정훈이가 좋으니, 창훈이가 좋으니?”하면서 창훈이에게 악센트를 넣어 물으면 꼬마들은 창훈이가 좋다고 대답했고, “창훈이가 좋으니, 정훈이가 좋으니?”하고 정훈이에게 악센트를 넣으면 정훈이가 좋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 있던 한국보육원에는 뜻있는 젊은이들이 찾아와 함께 일하기도 했고, 아니면 동화 한 마디라도 들려주었다. 김용호 씨의 기억에 의하면 그때 방문했던 인물로 박윤삼, 최영일 목사와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도 계셨다.

한국보육원 원생들의 기록

한국보육원 출신으로서 캐나다로 이민해 토론토 영락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다가 젊은 나이로 죽은 이희병은 김유선 여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낸 일이 있다.

“유선 누님, 저의 과거에 누님‧형님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한 시점이 있었음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하며 지내왔고 또 지내고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러서 갈 때까지 감사할 것입니다.”

이 글 속의 ‘형님’은 두말 할 것 없이 황광은 목사이다.

한국보육원 시절의 일기

제주도 한국보육원 교육부장으로서의 황광은은 겉으로 보기에 그저 행복하게만 보였고,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이상을 펴서 득의의 때를 만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 느껴지는 그의 그런 인상과는 달리 그는 무척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깊이 고민한 것은 그를 시샘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다음은 1951년도의 그의 일기 가운데 몇 대목이다.

6월 27일

재주보다 노력! 재주는 선천적이고 노력은 후천적이다. 꾸준한 노력이 아름다운 것이다.

7월 1일

떠난다 떠난다 하다가도 정작 떠나게 되었다는데 설움이 있거늘 죽는다 죽는다 하다가 정말 가게 되었다고 할 때의 서러움이 얼마나 크리오.

7월 4일

공(公)을 위해 사(私)를 생각하는 사람과 사를 위해 공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너는 과연 어느 편에 속하느냐?

7월 7일

모였다(직원회). 결국 막혔던 것은 풀리고야 만다. 풀릴 실마리를 잡지 못해 풀리지 않는 것이다. 실마리처럼 첫 끝만 잡으면 풀려 나가는 것이 오해라는 것이다.

8월 1일 

윤태에게 알려 주고야 말았다. 네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샛말간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나대로 내 어머니 생각을 했다. 마르고 또 여윈 내 어머니! 그 어머니가 도리어 나를 염려해서, 닭을 삶아 놓고 내려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할 수 없이 일어나서 밥을 지으시는 어머니가 이건 또 웬 힘으로 이렇게 했을까?

8월 4일

매일 분주하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바닷가에 아이들을 내어보내고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갔다. 여위고 앓고 또 약해진 어머니를 나는 보았다.

8월 8일

밤 늦게까지 부두에서 백로반과 함께 노래부르며 지냈다. 반달이 바다 위에 은파를 그리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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