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지리산 공비 마천지서 습격 때 살아난 순경과 면서기

Google+ LinkedIn Katalk +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제주 4.3 항쟁 진압 출동 정부의 명령을 받은 당시 14연대는 남로당 지창수 선임하사관 선동으로 2500명이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여수 순천 보성 광양 일대가 인민공화국이 됐다. 

이 때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두 아들 동인 동신이가 순교했다. 송호성 토벌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정부 토벌군에 밀려 반란군 1천여 명이 지리산 공비가 됐다. 

여수순천반란사건 일어난지 두 달 되는 그해 12월 19일 지리산 공비 총지휘자 김지회(육사 3기), 홍순억(육사3기) 두 중위가 공비를 이끌고 지리산을 넘어와 삼정부락을 거처 마천지서 ‘경남 함양군 소재’ 습격에 나섰다. 군복 차림에 어깨 멘 엠원(M1) 소총에 태극기를 꽂고 ‘양양한 앞길에’ 군가도 부르며 행군했다. 지서 근처 마천교 다리목 보초 순경이 군인인 줄 알고 “수고하십니다” 손을 내밀자 팔을 낚아채 옆에 전봇대에 묶어 두었다. 보초 교대차 오던 순경은 부리나케 뒤돌아 달아나며 도로변 똥통에 빠졌다. 머리 위에 지푸라기를 깔고 숨어 있을 때 변소까지 왔던 공비는 허탕치고 돌아섰다. 계획대로 마천지서에 당도한 공비들은 총을 난사해 지서 난로변 순경 4명이 사망하고 담배 감정일을 보던 함양, 거창 전매서 직원 6명도 사망했다. 쌀창고 옆 개울 위로 걸쳐진 돌다리 밑에 앉은 면서기는 완장 달린 팔을 밖으로 내민 채로 피신하는데 엉덩이를 향해 공비는 엠원총 8발을 다 갈겼다. 총맞고 살아난 면서기 이야기를 1954년도 가을 마천초등 동창인 나의 숙부댁에 왔을 때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목욕탕에 가서 면서기로부터 그 경위를 다 들었다. 황급히 마산병원으로 후송되어 완치 되었다고 했다. 마천교 근처 전봇대에 묶였던 순경을 공비들이 삼정부락까지 끌고 왔을 때 공비중 하나가 이 반동새끼 자기가 사살하게 해 달라고 상관에게 허락받고 끌고 가던 순경을 숲속 소나무에 묶어두고 공비 일행이 멀어져 갔을 때 공중을 향해 총을 한방 쏘았다. 그리고 그의 일행을 뒤따라 갔다. 살려 줄 연극을 꾸미고 공비가 살려 준 순경은 일제시대 일본에서 공비와 이웃으로 살았던 다정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처럼 적과 적으로 만났으나 그 공비도 사상보다 인간사랑이 앞서 순경을 살려 준 것이다. 변소 똥통에 빠졌던 그 순경은 공비들이 물러 간 뒤 조용히 변으로 범벅이 된 채 옆에 흘러가는 냇물에 몸을 담그고 몸도 씻고 옷도 깨끗이 빨았으나 변냄새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어쨌거나 순경 두 사람은 총알 세례없이 살아나고 면서기는 돌다리 밑에서 엉덩이에 8발 엠원 소총 집중 사격을 받았으나 살아났다. 산 높고 물 맑고 인심좋은 마천사랑의 하나님 은혜로 살아난 것이다. 무속신앙이 강한 마천은 1960년대 중반까지 교회가 없었다. 지금은 마천교회,창원교회, 지리산교회, 의탄교회, 삼정교회 등 다섯 교회가 마천고을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1954년 지리산 공비 소탕이 되기 전까지는 지리산 인근 고을인 함양, 산청, 하동, 구례, 남원에는 공비들이 밤마다 식량을 털어가서 민간인 피해가 아주 컸다. 지리산에 평화가 온 1955년도부터 지리산 천왕봉을 찾는 등산객이 사철 붐비고 있다. 남원시 뱀사골에 선 지리산 전쟁기념관에는 빨치산 지리산 공비 총지휘자 김지회가 사살된 곳이 표시되어 있다. 공비들이 쓰던 무기도 전시되어 있다. 내가 살던 마천 도촌 마을 강구옥씨는 공비들에게 반동으로 잡혀가 마천 영원사 절 입구 바위 밑에서 공비의 칼에 비참하게 살해 되었다. 강구옥 이름은 마천비석거리 충혼탑에 새겨져 있다. 공비 없는 지리산 하늘은 날마다 푸르고 자유롭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