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외로움 속 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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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직격탄을 맞지 않는 곳이 없겠지만, 노인 시설은 운영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코로나 확진보다 혼자 남겨진다는 고립감이 더 무섭다고 했다. 이제 보니 코로나는 아픔이 아닌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어느 순간 의식주가 해결된 이후엔 문화적 욕구와 명예욕까지 채워 보지만 이상하게도 고독과 외로움은 더 커져가며 또 다른 그리움만 쌓여가고 있었다. 이제 면역력이 생길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계절만 바뀌면 겉은 멀쩡한데 가슴은 시베리아 벌판처럼 싸늘하다. 어느덧 ‘홀로’(alone), ‘외로이’(lonely), 그리고 ‘고독’(loneliness)이라는 세 단어가 이 시대에 어이없게도 가장 위력적인 의미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처럼 곁에 좋은 사람이 있어도 외로운 이유를 칼 로저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줬을 때 상대가 수용해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마음 문을 열지 못하게 하면서 외로움은 커져만 간다는 것이다. 자신은 솔직하게 다 보여 주고 싶은데 상대가 내 약점을 평가하고 상처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외로우면서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가까이하길 원해도 상대를 신뢰할 수 없기에 최소한의 관계 속에서만 가면을 쓴 채 피상적인 만남을 갖다 보니 마음은 공허하며 삶은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 명대사는 ‘내면 아이’와 현재의 나와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과거에 상처받은 아이가 지금도 내 안에 살고 있다. 그 애가 바로 ‘내면 아이’다. 그 아이가 때때로 근심이나 열등감, 분노, 그리고 죄책감에 빠지게 되면 내 마음은 뒤죽박죽되면서 스스로 ‘쓸모없는 인생’, ‘실패자’로 느껴져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외로움은 더 극에 달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메시지였다. 우리는 속고 살았다. 인생은 외로울지라도 버림받은 존재가 아닌 것은 불행한 과거 자체가 ‘자아’가 아니기에 그렇다. 누구라도 이 어둠에서 벗어나려면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나는 지금 이곳에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100억 수표는 아무리 발로 밟고 침을 뱉어도 여전히 100억 가치가 있다. 그렇다. 내가 설령 누군가에게 짓밟히고 버림받아도 그러한 아픔이나 과거 자체가 ‘나’라는 존재 가치를 바꿀 수는 없다. 

분명 ‘소외’라는 정신적 질병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원초적 고통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외로움이 그렇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몸과 그림자는 하나이듯 사람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는 통과 의례가 될 수도 있다. 어쩜 이 의식들을 제대로 지나가지 않으면 일평생 두려움과 분노, 우울증이라는 거짓 자아 앞에 무릎을 꿇게 될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본시 사람에 대한 잘못된 기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외로움은 어쩜 이기적인 인생의 여정 속에서 당연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이니까 외롭다고 자위해보지만 생각해 보면 외로움은 또 사람 때문에 생겨난 바이러스다. 그러므로 외로움이 온몸을 감쌀 때마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 버릴수록 좋다. 흔히 정치권이 가장 무정하다고 말하나 세상이 다 무정하다.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무정하다. 사람은 의지하고 기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납할 대상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실망스러울 때마다 홀로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모든 기대를 내려놔야만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국인이 머리가 아픈 가장 큰 원인은 생각 과다에 있다. 두통이 올 땐 생각을 줄여야 하듯 외로울수록 자신을 묶고 있는 생각을 내려놔야 한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더 많다. 자기 생각에 빠질수록 억울하고 비참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벨트마냥 허리를 두르고 있던 뱃살도 살포시 내려놓아야 한다. 뱀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는 기막힌 생각들을 내려놔야만 외로움에서 벗어나 일상의 행복이 가슴에 새겨진다. 

나이 들수록 꿈은 있지만, 욕심은 내려놔야 우울하지 않고 외로워도 견딜 수 있다. 내 안의 욕심을 비운만큼 이웃이 들어온다. 부버의 <나와 너>에서 말하듯 ‘나와 너’는 인격적 만남이 되어야 함에도 ‘나와 그것’처럼 물질적 관계가 되어가기에 관계는 병과 상처를 안겨준다. 문제는 이 두 관계 형성에 따라 삶의 양상이 달라진다. 부버는 더불어 살아가는 인격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서만 참다운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제 교회는 코로나 일상 속에 해야 할 일이 더 분명해졌다. 아니 교회 본래 목적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시대에 외롭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해야만 <나와 그것>이 <나와 그>가 되므로 인생의 멋과 맛을 알고 외로움 속에 사랑이라는 ‘새순’이 돋아 ‘소외’라는 자아를 벗어나 눈을 떠도 두렵지 않은 삶이 된다. 

한억만 목사

<강릉하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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