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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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순례단의 역사(30)

상주에서 안동까지(5)

배위량은 1893년 5월 3일 용궁면에서 개포면을 거쳐 예천읍을 외편에 두고 길을 걸어 내성천 북쪽에 있는 호명면 종산리를 거쳐 월포리의 서당마을에 와서 내성천의 한적한 강마을에서 잠을 잤다. 배위량이 쓴 일기에 “지난 밤에 상주에서 100리 떨어진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잤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서당 마을은 내성천 북쪽 강안에 형성된 마을로 내성천 북쪽 강변에 형성된 나루터가 있었던 작은 농촌 강마을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배위량의 일기가 말하는 보도의 진정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에 학교로 가기 위해 4km정도 걸어가서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가 있는 마을에 나루터가 있어 그 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학교로 오갔다. 그런데 나루터가 강변 마을마다 있지 않고 대개가 면소재지나 오일 장터가 있는 큰 마을로 가는 길에 나루터가 있었다. 필자가 자란 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이 사촌리(沙村里) 중간을 통과하는데, 사촌리는 5개의 마을 중에서 4개 마을은 회천 동쪽에 있었고 필자가 자란 황성마을은 회천 서쪽에 있었다. 겨울철에는 황성마을 어른들이 우곡면민들이 고령 오일장으로 다닐 수 있도록 황성마을 북쪽에 있는 주막가까이에서 개진면 신안리 방면으로 나무다리를 놓아서 우곡면 사람들은 그 나무다리를 통과해 고령읍에 있는 오일장으로 나들이를 했다. 황성마을 사람들은 겨울철이면 얼음이 얼은 회천강을 건너기 어려워 마을 북쪽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 약 2km 걸어서 사촌리 서재 마을에 있는 사촌교회를 다녔다. 같은 동네지만, 겨울철에는 그렇게 멀리로 돌아서 교회를 가는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다리가 없는 겨울이외의 계절에는 사촌리에는 황성에 나루터가 없어 그 마을 사이에 있는 황성마을 북쪽방면에서 흘러와 동쪽에서 휘돌러 남쪽으로 흐르는 회천의 물을 건너서 사촌 교회를 다녔다. 겨울에는 황성마을 북쪽에 있는 나무다리를 건넌 후 약 2km를 돌아서 사촌리의 교회를 다닌 것도 하나의 추억꺼리가 된다. 초겨울에는 나무다리가 아직 놓이지 않아 살얼음을 깨고 옷을 걷고 동생들 3명과 동네 동생들을 업고 회천을 건너 주기도 하면서 사촌교회로 다녔다. 초겨울에 살얼음을 깨고 회천을 건널 때 그 차가운 물이 주었던 쓰라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럴 때마다 황성마을에서 사촌리로 가는 회천에 다리나, 나룻배가 사촌리와 황성마을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린 시절에 늘 했었다. 그런데, 회천이 동네를 분리하고 있어 바로 동쪽에 회천을 건너면 사촌리로 갈 수 있지만, 지금도 같은 동네인데도 황성마을에서 사촌리 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야정리와 옛날 나루터가 있었던 도진리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 약 7km를 돌아서 간다. 

위의 필자의 글은 마을마다 모두 나루터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오일장이 서거나, 인구가 많고 중요한 마을이나, 행정 중심 지역으로 가는 길로 연결되는 곳에만 나루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골의 면 소재지 마을이나, 중요한 5일장이 있는 큰 마을로 가는 길에 나루터가 있기에 예천군 호명면에서 예천읍으로 다녔던 옛길은 안동 풍산방면과 안동 풍천방면에서 예천읍의 오일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호명면 오천리에서 나룻배를 타고 호명면 월포리 서당마을에서 나룻배에서 내려 호명연 종산리와 예천읍 왕신리와 남본리에서 한천을 건너 예천 오일장으로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1893년 5월 3일 용궁에서 나와 개포면을 거쳐 예천읍 시가지가 보이는 예천 변두리 지역을 거쳐 지나다가 호명면 종산리를 지나 월포리 서당마을의 나루터 강가의 주막에서 3일밤에 잠을 잔 후 4일 아침 일찍 나루터에서 나와 나룻배를 타고 내성천을 건너 강 맞은편에 있는 호명면 면소재지 마을인 오천리를 거쳐서 풍산으로 가기 전에 낙동강지류인 신역천을 다시 건너 풍산까지 정오에 와서 풍산에서 일기를 쓰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일기를 남겼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5월 4일에 배위량이 강을 두 번 건넌 것이 확인이 된다.

3. 어제 예천 읍내를 왼편에 두고 지나왔다.

1. 지난 밤에 상주에서 100리 떨어진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잤다. 

2. 오늘 아침에는 강을 두 번이나 건넜다.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왔다.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아마도 호명면의 면 소재지 마을인 오천리인 듯하다.

영남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조선 조정은 임진 왜란후  선조 치세시에 한 때 안동에 두었던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겼다. 현재는 예천군 호명면과 안동시 풍천면 지역이 경상북도 도청 소재지가 조성되었다. 호명면 지역이 김해평야나 압량벌처럼 큰 평야지대도 아닌데, 배위량은 왜 호명면을 지나면서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라고 했는지에 대한 것은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한 과제인 것 같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내성천 강변에 있는 마을로 면소재지 마을인 오천리에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 그 마을을 그렇게 표기한 듯하고 그 마을이 내성천 강변에 있는 마을이기에, 물을 대어 농사짓기에 좋은 위치에 있어 땅이 비옥한 지역으로 비쳐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런 필자의 추측이 맞다면 내성천 강변마을인 서당마을에서 풍산까지가 거리상 12km정도되니 3시간이면 걸을 수 있고 나룻배를 타고 내성천을 건넌다 해도, 아침일찍 출발하면 정오에 풍산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배위량이 출발당일날 정오에는 충분히 풍산에 도착해 그곳에서 일기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2015년 12월 2일에 용궁면 시장터와 회룡포를 돌아보고 시외버스로 풍산으로 갈 때에 그저 용궁에서 예천을 거쳐 갔기에 어느 곳이 어느 곳인지를 알지 못하고 호명면을 거쳐 갔지만, 그저 새로운 문물에 신기함을 느끼며 지나갔다. 

하지만, 배위량 길을 순례하면서 용궁을 출발해 예천을 거쳐 호명면을 지나갈 때는 ‘이렇게 머나먼 길을 그 옛날에 그 어른께서 낮설고 물선 땅을 어떤 마음으로 걸어갔을까?’ 생각하며, 주님을 향한 배위량의 열정, 모험, 신앙적인 충성심과 열심을 생각하면서 걸었다.

모든 길은 걷기에 힘이 들고, 어렵고 고난의 길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걷는 길이 모여서 우리의 인생길이 될 것인데, 그 길이 주는 의미가 큰 것 같다. 배위량은 용궁에서 풍산까지 가는 첫 길에 큰 비를 만나 길을 가지 못하고 용궁에서 쉬면서 하릴 없이 기다리다가 비가 그치는 것을 보고 급히 길을 떠났다가 강 앞에서 길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예기치 못하고 이름도 밝히지 못했던 작고 낯선 땅, 강마을에서 보낸 밤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피곤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날 잠을 잤던 주막집에 등잔에 기름이 떨어졌는지, 그날 밤에 일지를 쓰지 못하고 그 강마을에서 안동 가는 길에 풍산에 들려 풍산에서 1893년 5월 4일 정오에 3일에 일어난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가는 나그네이다. 우리가 걷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고, 배위량이 용궁에서 안동으로 가는 길에 예기치 못하고 내성천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낯선 땅 작은 강마을에서 어두운 밤을 보냈듯이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도 많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배위량은 우리보다 먼저 인생길을 걸었던 순례자이고 우리의 신앙의 선배이다. 그가 걸었던 길은 그래서 우리에게 던져 주는 시사점이 많다. 우리가 그 길을 걸으면서 그가 무슨 마음으로 낯선 땅 조선에서 그 길을 걸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면 좀 더 의미있는 인생길 걷게 되지 않을까?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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