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1)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이기풍 목사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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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회 전도 집회, 결심 이후 낙심·이탈 확률 낮아 

제주 교인들 도덕성… 일반인 표준보다 훨씬 높았다

이기풍 목사는 1913년 5월부터 연말까지 휴식했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의 휴식 동안도 매우 바빴다. 그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 교회에 다니면서 제주선교를 보고함으로 선교비 후원을 받았다.

전라 노회의 결정은 1913년 9월 제2회 총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에서 총회에 참석해 제주선교 상황을 보고했으며, 제주에서 예배드리는 교회는 성안교회, 모슬포교회, 조천교회라고 했다. 

이기풍 목사의 사역은 전라 대리회의 사역으로 진행됐다. 1911년 전라노회가 창립되면서 그는 노회에 협력했다. 1912년과 1914년 부 노회장으로 선임됐다. 전라노회가 제주선교를 전담하기로 한 것은 1912년 8월이었다.

이 계획으로 1913년 총회에서 전라 노회는 제주선교를 전담하도록 허락받았다. 제주를 돌아보는 것은 전라 노회에 맡겨 전도국 일 년 회의 경영과 예산에서 주는 대로 했다. 일 년 동안 선교비는 총회와 전라 노회가 각 절반씩 부담했다. 사기(史記)에도 총회의 의안으로 정리했다. 

제주선교를 전담할 전라노회와 남 장로교 한국선교회는 1914년 여름 전주의 테이트(L.B.Tate:최의덕) 부부와 목포의 니스벳 부부가 함께 제주에서 7일 동안 전도 집회를 했다. 최의덕 선교사 부인(Mattie lngold Tate)은 심방과 현지의 인상을 기록했다.

“8곳의 예배하는 곳과 90명의 세례교인이 있다. 니스벳 부인과 나는 49명의 여성반을 가르쳤다. 니스벳 목사와 테이트 목사는 25명의 선발된 남자반을 가르쳤다. 매일 저녁 부흥회가 있었다. 부흥 집회에는 250-400명 정도가 모였다. 날씨가 무더워 집회는 교회 뜰에서 진행됐다. 신자들이 불신자들을 데려왔다. 그들 중 믿는 사람이 생겼다. 교회는 좋은 공동체라는 인상을 남겼다. 제주 사람들은 미신의 습관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기가 쉽지 않으나, 일단 결심하면 낙심해 이탈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다. 

선교사 일행과 이기풍 목사는 특별집회를 잘 마쳤다. 1914년 8월 제4회 전라 노회에서 제주교회를 보고했다. 이기풍 목사가 보고하는 제주교회 형편은 특별히 주의를 끄는 부분이 있었다. 

즉 제주의 초기 교인들이 주민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믿은 형제자매의 성품이 굳건했다는 표현이다. “인심을 얻어”라는 표현은, 제주 초기 교인들의 도덕성이 제주인들의 표준보다 훨씬 높았다는 뜻이다. 이는 초기 한국교회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던 기독교인의 우월한 도덕성이 선교와 전도의 필수 요소로 작용했다. 또 “형제자매의 성질이 굳건하여”라는 표현은 제주의 토속적이며 미신적인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대한 토착민의 반발, 가족에게 배척받으므로 기독교인이 되는 데 따른 각종 불이익을 잘 견뎠다는 뜻이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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