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룻기를 읽고 명상에 잠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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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는 고부간의 단순한 대화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이 그 안에 숨어 있기에 그렇다. 우리가 얼른 생각해보면 ‘나오미’와 ‘룻’의 대화 내용으로 볼 때 흔히 도덕 중심으로 읽기 쉽다. 도덕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밝혀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룻기는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진 구원서요, 은혜의 복음서다. 1장 1~2절을 보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 이름은 ‘말론’과 ‘기론’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었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이 말씀을 깊이 살펴보면 베들레헴은 선민이 사는 지역이요, 모압 지방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큰딸이 아버지와 동침해 낳은 못된 피로 이루어진 이방 족속이 사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선민과 이방인이 동거함을 적극 금했는데 ‘엘리멜렉’의 가족은 이 말씀을 어긴 것이다.  

사사시대에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그를 피해 먹을 것이 풍족한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오미’ 남편 ‘엘리멜렉’이 모압 지방의 돌림병으로 죽고(룻1:3) 그 뒤 두 아들마저 죽었다.(롯1:5) 엘리멜렉이 배고픔을 피하려다가 가문(家門)이 망하는 엄청난 수난이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아픔의 세월을 하루하루 넘기는 ‘나오미’에게 베들레헴에 흉년이 그쳤다는 기쁜 소식이 들리자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길에서 고부간에 이루어진 대화다. 아주 꽃다운 두 젊은 며느리가 남편을 잃고 홀로 되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두 자부에게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여 복된 가정을 이루라(1:8)고 강권했다. 그때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돌아갔으나 작은 며느리 ‘롯’은 “어머니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며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6~17)라는 말로 헤어질 수 없음을 굳게 맹세했다. ‘나오미’는 ‘룻’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약속의 땅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한 그 말씀이 룻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엘리멜렉’의 가문은 이미 혈육이 모두 끊어져 소망이 전혀 없는 절망의 상태였다. 그런데도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끝까지 따르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인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보신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물론 일부일지라도 그렇지 아니한가? 

끝까지 싸워 보지도 아니한 채 얼른 포기하거나 마냥 안락만을 취하는 인생의 자세는 잘못된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으로 여기는 그 삶 자세도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의미다. 삼손이 자기의 눈을 뽑힌 뒤에야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의지하며 부르짖었던 일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시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베들레헴에 돌아온 ‘룻’은 양식을 구하려고 가을 추수가 한창인 ‘보아스’의 밭에서 우연히 이삭을 주웠는데 알고 보니 그는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권유로 ‘룻’은 ‘보아스’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엘리멜렉’의 끊어진 가문을 또 다시 이어주는 경사를 룻이 이루었다. 당시 유다 지방에는 대가 끊기면 형제가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친척과 결혼해 낳은 아들로 그 가문의 대를 잇는 풍습이 있었다. 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가문의 기쁨이다.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이니 다윗왕의 할아버지다. 이 사실을 자세히 알리기 위해 룻기 4장 끝 부분에 족보를 기록해 놓았다. 그 이유는 무얼까?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담겨있다. 룻기의 핵심이 담겨 있다. 복은 거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절망과 좌절과 실망 속에서 어떻게 이를 극복했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가치가 주어짐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다윗 왕을 세우실 때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그러하셨으니 우리는 조용히 그분의 뜻을 살펴보자. 그러면 그 해답이 주어질 것이라 여겨진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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