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피울음으로 오늘 밤도 ‘렌’은 ‘시몬’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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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자마자, 닷새 만에 완전 매진됐고 나머지 일기도 마저 읽게 해 달라는 독자들의 성화가 삽시간에 온 장안을 요란하게 만들었다. 모윤숙은 이 상황을 전해 듣고 몹시 놀랐다. 그러면서 분노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도 있는가라며 지훈을 불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동탁은 일부러 며칠을 시간 끌다가, 느긋하게 모윤숙 앞에 찾아 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먼저 용서를 빌면서 전후 사정을 변명으로 뱃심좋게 설명했다. 자초지종 사연을 자세히 들은 작가 모윤숙은 자존감이 상한 것은 분명했지만, 어쩐지 그렇게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어린 동탁을 발길질로 몇 번 걷어찼지만, 발 끝에 힘이 가지도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으며, 얼굴에는 노기대신, 기쁨의 미소만 있었다는 동탁의 후일담도 매우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일월서점’으로부터 받은 두툼한 돈 봉투를 들고 찾아간 동탁을 보더니 “야, 너 이리와!” 손을 높이 치켜들고 때릴 듯 흉내를 내더니, 이내 동탁을 와락 끌어 안아주며 “동탁아! 참 고맙다”라고 말하는 모윤숙 시인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했다. 언제나 그랫듯이 통큰 모윤숙은 봉투안의 돈을 헤아리지도 않고 절반을 뚝 잘라 동탁에게 건넸다.

“아닙니다예. 이거 너무 많아예.” 놀란 동탁이 크게 사양하고 나서니 모윤숙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너 돈 때문에 사고친 게 아니니? 한번 실컷 써봐!” 그러면서 모윤숙은 박장대소 목젖이 다 보이며 웃고 서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렌의 애가’는 찍어내고 또 찍어내도 끝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모두 이 시집 이야기뿐이었다. ‘렌의 애가’를 읽어 보고 시를 좋아하는 유진오 박사는 이렇게 평했다. “렌의 애가는 한국판 ‘좁은 문’이며 여자 쪽에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라고….

결국 대화들의 귀결은 이 시에서 작가 ‘렌’이 피울음으로 울며, 밤마다 찾고 있는 그 ‘시몬’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하는데 모아졌다. 이때, ‘렌의 애가’는 춘원의 젊은이들 머리의 등잔불 심지를 높이던 필독서로 그 인기는 그야말로 만점이었다.

결국 뭇사람들의 입방아에 ‘시몬’은 춘원이라는데 의견들이 모아졌지만, 당사자인 모윤숙과 춘원은 결코 ‘그렇다’라는 속 시원한 자백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선생님! 춘원이 맞지요? 이젠 밝혀도 되지 않아요?” 

오랜 세월이 흐른뒤, 그 동안 무단에서 줄곧 모윤숙을 보좌했던, 성기조 시인이 수차례 물어 봤지만, 모윤숙의 태도는 늘 한결같았다 한다. 가타부타 대답은 없고 항상 빙그레 웃기만 한다는 것이다.

모윤숙은 그럴 때마다 한 가지 달라지는 행동이 있다했다. 대화중에 ‘춘원’ 이야기만 나오면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금세 정숙한 숙녀처럼 고쳐 앉는다는 것이다. 팔순의 말년까지도 그 버릇은 계속되었다라는 성기조 시인의 증언이 있다.

90년에 팔순의 나이로 이 슬픈 노래를 못다 부르고 간 모윤숙 시인! 지금은 어느 숲속에서 시몬을 찾으며 아직도 피울음을 울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

내 딸아! 살면서 외롭고 괴로울 땐, 이 찬송가를 불러라

춘원 이광수는 그 생애의 중요한 말년인 1944년 3월부터 1948년 9월 까지 4년 반 동안 손수 지은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사릉’집에서 거처했다. 춘원은 이 집에서 세 아이들과 같이 해방을 맞았다. 이 땅에 자유의 해방이 왔지만 춘원은 기쁘면서도 몹시 괴로웠다.

그는 이 시기, 이곳에서 지난날의 아픔을 되씹으며, 반성하며 살아가는 고통의 기간이기도 했다. 농토를 좀 사고 소도 사서 자기를 몹시 따르는 청년 박정호와 함께 농사를 짓기도 했다. 마음속 깊이 아픔을 되새김질하며 춘원은 이곳에서 반성의 많은 시간을 가졌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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