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부활절,  아리마대 요셉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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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은 최고 법원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 유명하고 당시 특권층이었다. 존경받는 의원이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의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주님의 사역 기간에 등장한 일이 한 번도 없다. 아리마대 지방 출신으로 사무엘과 같다.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인간의 심령과 생활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다. 하나님의 통치가 점점 확장되기를 열심으로 갈망했다.

사람은 위급할 때 그 믿음의 실체를 드러낸다. 마음의 진실이 드러난다. 좋을 때는 모른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두려움 없이 나타낸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에 신앙을 고백했다.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다 도망갔지만 요셉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평상시에는 유대인들이 두렵고 산헤드린의 위협이 무서워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옹호하지 못한 숨어 있는 제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의 심령과 삶에 변화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섭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은혜가 넘칠 수 있다.

다윗은 이런 사람을 ‘주의 숨긴 자들’이라고 불렀다. 솔로몬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한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것이 메마른 것도 아니다. 요셉은 엘리야 시대에 숨겨둔 7천 명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면 하나님께 인간의 죗값을 지불할 수가 없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주님의 성육신(成肉身), 설교, 비유, 기적,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 등이 둘째 아담의 죽으심이 아니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담에게 내려졌던 형벌이 그 효력을 잃지 않은 채 모든 후손들에게 내려졌을 것이다. 내 영혼을 구원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육신, 생명의 피뿐이다.

 로마법에 의하면 사형을 당한 사람의 시체는 매장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요셉의 행동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달라고 요청했다.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을 다해 세마포로 쌌다. 아직 장사(葬事)한 일이 없는 무덤 속에 모셨다. 바위를 판 무덤인데 요셉 자신이 들어갈 무덤이었다. 세마포 안에 몰약과 침향 등을 뿌렸다. “그는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했다.

부활은 기독교의 토대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다.  ‘안식 후 첫 날’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경건한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다.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이 무덤에서 굴러져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아~! ‘부활하셨던’ 것이다. 무덤에서 주님을 찾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일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믿음과 선행이 있었기에 우리는 사순절 기간에 위로와 감사를 더하며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부활절을 맞게 된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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