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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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난지도 삼동 소년시 ①

표어 ‘오며 감사, 가며 감사, 있어 감사’

근본정신, 소년시서 배우고 익혀 실천

개인적 행복 보다 사회봉사 마음 써

난지도에 멋진 ‘보이스 타운’ 건설 계획

제주도 한국보육원에 있던 나는 가족을 찾기 위해 1953년에 혼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폐허가 된 거리에서는 가족은 커녕 먹을 것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1954년 10월 13일에 서울 YMCA에서 운영하는 고아들의 마을 보이스 타운(BOY’S TOWN)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난지도의 보이스 타운의 운영 방식은 미국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OMAHA) 보이스 타운을 본따 만든 고아원으로서, 그 소년시의 책임자는 황광은 원장과 그 부인 되시는 김유선 선생님이었다.

이들 두 분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보이스 타운은 가정과 집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수용된 청소년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 소년시의 교훈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였고, 그 생활 표어는 “오며 감사, 가며 감사, 있어 감사”였다.

이와 같이 근로와 근면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자는 신조 아래 소년들에 의한 자치 행정으로 보이스 타운은 운영되었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와 같이 생활하는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한 경험의 장소가 되었다.

나는 1955년에 200명이 넘는 소년시민이 사는 난지도 보이스 타운에서 제3대 소년시장으로 선출되었다. 200명의 소년시민들을 행정적으로 움직이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당시 시장 고문직은 이창식 선생님이 책임맡고 계시면서, 소년시 운영에 큰 도움을 주셨다.

내가 시장이 된 후 맨 처음 내게 주어진 책임 중 하나는 매일 소년시를 방문하는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역할이었다. 그 일을 하자니 자연히 세계의 보이스 타운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공부를 통해 미국 병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알게 되었다.

난지도 소년시 운동장 한가운데 돌로 만든 기념탑이 있었는데, 그 탑 위에 다섯모로 조각된 조형 속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목숨을 잃은 제5 독립연대 미국 병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며, 5연대의 생존 병사들이 마련한 기금으로 이 작은 섬에 BOY’S TOWN이라는 고아원을 세워 목숨을 잃은 전우들을 기념하고 또한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게 한다.”

당시 제5 독립연대는 4만 불의 후원금을 거두어 이곳에 21개 동의 집과 농장을 건립했다는 신문 기사를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때 내 나이는 어렸지만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 하며, 남에게서 진 신세는 꼭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근본정신을 난지도 소년시에서 배우게 되었고 그것을 몸에 익혀 살게 되었다.

난지도

한국보육원에서의 나날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황광은의 마음은 많은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결혼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번민했다.

나이가 차면 결혼하는 것이 순리이겠으나 그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했다. 어려서부터 주의 사업과 사회사업을 위해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결심을 해온 터였고, 지금에는 비록 헤어져 있으나 YMCA의 현동완 총무도 광은이 독신으로 지내며 사회를 위해 공헌해 주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눈앞에 김유선 양이 있어 마음을 사로잡고 있고, 또 돌아가신 어머님 영전에 가까운 시일 안으로 결혼하겠다는 것을 맹세한 처지였다. 그러니 결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깊은 갈등을 겪고 난 뒤 마침내 4월 26일에 결혼식을 거행하게 된다. 그 무렵에 황광은이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고, 앞으로의 설계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었는지 하는 것은 그의 편지와 일기를 읽으면 알 수 있다.

우선 1952년의 새해가 밝는 1월 1일에 그는 김유선 양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내 유선에게

몇 번이나 문 앞에 갔다가 왔는지 몰라. 아이들이, 선생님들이 그리고 내 마음이 보기 부끄러워서. 12시 제야의 종이 울릴 때, 그리고 오늘 아침 첫눈을 떴을 때, 유선이를 생각했어요.

남들은 다 행복을 빌고, 우리도 행복이 있는 줄만 믿지만 이 괴로운 길을 어떻게 간다고 글쎄 나를 사랑하게 되었나요. 유선이가 가엾어.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멀리 있지 않은 유선이가 왜 그렇게 보고 싶을까. 그런 유선이의 얼굴보다는 마음이 더 그립고, 마음보다는 사랑이 더 그리워요.

우리의 일도 집도 옷도 그리고 몸도 마음도 다 낡아 빠지고 없어져도 사랑만이 영원히 남아 주었으면.

새해에는 진실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요. 바른 길을 옳게 걸어 나아가는 우리 앞에 무서운 게 있을까요.

우리 둘이서 불쌍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을 해가 맞도록 사랑해 줍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1월 21일자로 쓴 편지에는 결혼의 의사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편지에도 한 인간의 개인적인 행복에 앞서서 사회봉사를 염두에 둔 마음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유선이!

너무 무리했지요? 내가 너무 많은 짐을 지워 드린 것이 미안해서 몇 번이나 갔지만,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왔어요. 날더러 연애에 빠지지 말고 다시 옛날처럼 일하라고? 결혼하면 일 못 한다고? 미친 소리야. 날더러 미쳤다지만 그것은 더 미친 소리야. 삼십이 된 날 보고 그래 무엇이 모자란다고 결혼 말라고.

지도자! 그것을 향해서 요구하는 대중은 너무나 잔인해. 살 깎고 뼈 깎고 피마저 말리고 또 무얼 더 요구하는 건지 몰라.

나는 결혼하려고 유선이를 사랑한 건 아니야. 내 어린 동생들을 가장 사랑하는 유선이기 때문에, 그리고 유선이는 나를 행복의 대상으로 사랑한 건 아니야. 그것은 고초를 가운데 두고 괴로운 데로 뛰어든 것이야.

이걸 아는 건 유선이와 나뿐이야. 앞으로 올 커다란 일(희생)을 위한 제물로 묶어 놓은 한 쌍의 고기 덩어리야. 외롭더라도 참아요. 절대로 옳게 가는 길이란 그렇게 구부러지지만은 않을 것이니까.

2월에 접어들면서 황광은은 서울에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으니, 전에 일하던 난지도로 가서 ‘보이스 타운’을 다시 한번 멋지게 건설해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서울로 떠나면서 김유선 양에게 쓴 2월 19일자 편지는 그의 굳은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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