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제주도 산신령 뱀을 때려 죽인 이기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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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출신 이기풍(1965-1942)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 7인 가운데 한분이다. 졸업과 더불어 먼 제주도에 선교하러 떠났다.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 생명을 잃을 뻔했다. 어부의 고깃배를 타고 제주도에 왔으나 예수 귀신 물러가라는 핍박이 심했다. 의식주 해결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어느날 밤 제주 무당이 산신령에게 인신공양(人身供養)의 굿을 한다는 소릴 듣고 횃불든 사람들 따라 굴속에 들어갔다. 

큰 바위가 나오고 그 바위 위에 대여섯살난 병든 어린이가 흰 천을 덮은 채 누워 있었다. 한참 발광하듯 굿을 한 무당이 물러나자 어린이 두 눈에 눈물이 흘렀다. “얘야 걱정마라 내가 있다.” 이 말을 할 때 큰 뱀의 혀가 어린이 앞에 와 있었다. 순간 이기풍 목사는 힘껏 가져간 몽둥이로 뱀 목을 내리쳤다. 방향을 바꿔 갑자기 이기풍 목사 몸을 휘감은 뱀은 이 목사 얼굴 앞에 혀를 날름거렸다.

질세라 바위에 뱀의 목을 움켜쥔 채 문지르기 시작했다. 젖먹던 힘까지 다 해 싸운 이기풍 목사 몸에서 뱀 몸둥이가 풀려나갔다. 뱀이 죽었다. 이기풍 목사는 죽은 뱀 머리와 몸둥이를 사정없이 몇 번 더 내리쳐서 뱀사탄을 확실하게 때려 죽였다. 어린이를 데리고 나온 굴밖은 가을달밤이다. 어린이를 앞세워 찾아간 집에서 “엄마” 부르니 아무개야 하고 나오던 엄마가 금방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죽은 딸 귀신이 온 걸로 착각한 것이다. “나 이기풍 목사가 여기 있소” 말하니 반갑게 뛰쳐나와 딸과 이 목사를 방으로 맞이했다. 

병든 딸이지만 무당에게 돈 받고 팔았던 양심가책에 괴로워 할 때 살아온 딸과 생명의 은인 이 목사를 맞이한 부모는 너무 고맙고 기뻤던 것이다. 다음날 제주 산신령을 때려 죽여 제주도는 망하게 되었으니 저 예수 귀신을 때려 죽이라고 무당이 악을 썼다. 제주 사람들이 낫을 들고 몰려올 때 순교를 각오하고 있는데 그 군중 가운데 한 남자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그 군중 무리를 위협해 다 쫓아버리고 한 여자의 업은 어린애를 빼앗고 바다로 달아나 매인 배를 탔다. 재빨리 뒤따라간 이기풍 목사가 어린애를 빼앗아 어린애를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정신착란 걸렸던 남자도 데려왔다. 그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 감동적인 광경을 본 제주 사람들이 이기풍 목사를 위해 교회를 지어드렸다. 그리고 교인이 되어 이기풍 목사의 설교를 은혜롭게 들었다. 5년 정도 선교활동하고 진도, 광주 지역으로 목회지를 옮겨 전도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목포경찰서에 잡혀가 일제 고등계 형사에게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했다. 1938년 9월 제27회 조선장로회총회에서 홍택기 총회장 사회로 신사참배하기로 결의해 부총회장 김길창, 감리교 양주삼, 성결교 이명직 목사 등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했다. 

이런 친일 목사 속에 신사참배 거부하고 신앙을 지켜 일사각오의 주기철 목사의 뒤를 이어 순교한 이기풍 목사의 순교정신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뱀이 많은 제주도에 가서 무당이 주장하는 큰 뱀 산신령을 죽인 이기풍 목사의 용기와 헌신은 제주 선교에 큰 빛을 이루었다.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에는 제주도에 복음선교를 하고 일제 고문으로 순교한 이기풍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교회 이기풍 선교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 

제주 사람들이 이기풍 목사에게 지어준 첫교회는 지금 제주시내에 서부교회로 부흥 발전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기풍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 순교정신과 헌신적인 선교정신을 잘 이어가야 할 것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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