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발언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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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인 필자의 어머니는 평양 근처에 사시다가 1.4 후퇴 때 부모님과 함께 월남하시었다. 평발이신 외할아버지가 발병이 나는 바람에 더 이상 이동할 수가 없어 부강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버지도 평양에 살았는데 1946년에 공산당이 밤에 집에 들이닥치자 팬티 차림으로 뒷문으로 달아나 월남했으며, 6.25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세종시에 편입된 부강에 정착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기에 주위 분의 소개로 결혼하였고 이듬해 자녀를 낳은 후 장인 장모와 합쳐서 평생 같이 살았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운영하셨고, 어머니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부모님을 모시고 헌신과 사랑으로 7식구의 살림살이를 하셨다. 한번은 아버님이 도지사 표창을 받았고, ‘80세 사위의 97세 장인 모시기’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가족이 소개되었다.

할아버지는 백수하시었고 할머니는 98세에, 아버님은 2016년 93세로 소천하셨다. 어머님의 체격은 왜소하지만 잔병이 없으셔서 할아버지처럼 장수하실 줄 알았다. 2019년 여름 우리 삼형제 부부는 어머님을 모시고 베트남 여행을 하였는데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었다. 여행 중에도 어머니의 표정과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껴서 큰형에게 치매 검사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상의하였다. 평소 경로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시던 어머니는 코로나 사태로 경로당이 폐쇄되자 집에만 혼자 있게 되었으며 식사도 거의 하지 않다보니 치매가 급격히 진행된 것 같다. 밥솥에 삼계죽을 남겨 두고 다음날 아침에 드시라고 했는데 일주일 후 가보니 상한 음식이 그대로 있었고 기억도 잘 못하시며 밥맛이 없다며 거의 식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아내도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퇴직할 때 같이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아내와 미리 결정하였는데 갑자기 상황이 악화되었다. 간병인을 두고 관리하던 중에 허리가 아프다고 하여 수술을 한 후 퇴원하여 우리 집에 모시고 왔지만 환경이 바뀌자 더 불안해 하셨고 치매가 심하여 안전상 집에 혼자 둘 수가 없었기에 결국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삼형제와 손주들이 번갈아 어머니 곁에서 24시간 지내다가 결국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요양원 생활 중 코로나와 폐렴 치료를 받았고 작년 3월에 소천하셨는데 이 모든 것이 2~3년 사이에 급박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님이 장수하실 줄 알았는데 기다려 주시지 않으니 후회막급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꼭 나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부모님 살아 계실 적에 전화라도 자주 하고 더 찾아 뵐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후회스럽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순영 장로

<충북노회 장로회장·명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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