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미학] 용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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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호는 전기밥솥에서 밥을 퍼 공기에다 담는 즉시 수저로 복판을 파놓고 급히 날계란을 깨서 그 속에다 넣고 밥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외간장을 한 수저 떠서 그 위에다 부었다. 여기에다 신 김치만 있으면 덕호는 그것으로 족했다. 

오늘도 특기인 계란비빔을 만들어 먹고는 소파에 가서 길게 앉았다. 사극 ‘한명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리모콘을 막 들어 올리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 회기동 언니 아직도 안 왔어요?” “응? 어 안왔어. 글쎄 내 걱정은 말라니까 일이 있어서 못오는 거겠지….” “아버지 덮어놓고 오냐 오냐 하시지 마세요. 며느리가 둘이나 있으면서 시아버님 진지도 못 차려 드린다면 그게 말이나 돼요?” “어허! 글쎄 괜찮데도 그러네…. 자 자 그만해 이만 끊자.”

덕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자기 뜻이 옳다고만 생각되면 끝까지 고집하는 외동딸 순희의 화난 음성이다. 홀아버지를 위하고 극진히 생각해주는 사람은 순희를 빼놓고는 없는게 사실이다.

“난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우리 어머니로 맞아 들인다는 것은 절대 반대예요.”

하긴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신병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어떻게 어디서 살아왔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여자가 차지한다는 것은 도저히 외동딸로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 주장이다. 다만 같은 말이라도 얼마든지 좋게 말할 수가 있을 터인데 꼭 이 대목에서만은 마치 싸움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핏대를 세워가며 앙칼지게 말하는 것이 덕호는 마땅치가 않았다. 덕호는 TV를 켰다. 사극 ‘한명회’가 아니었다. 

덕호는 갑자기 눈이 둥그레졌다. 어제 DBC에서 어버이날 특집으로 찍었던 대담장면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는 ‘외로운 분들’이라고 하는 은퇴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덕호의 차례는 지나가지를 않고 있었다. ‘이 장면을 애들도 볼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이 들자 덜컥 걱정이 생겼다. 

“선생님 사모님이 계시지 않으셔서 퍽 외로우시죠?” “나이가 들어도 외로운건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비록 거동을 못하는 몸이라도 살아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으랴하는 생각을 합니다.” 덕호는 화면을 보면서 순희가 몹시도 마음에 걸렸다. “선생님 이러한 말씀을 드려서 실례가 되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자녀들께서 간절히 권유하신다면 여생의 반려자를 맞이하시겠습니까? 솔직한 심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아나운서의 질문에 덕호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역시 삶이란 의식주만 해결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말의 상대로서 돕고 돕는 상대로서 있어주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삶의 환경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역시 선생님이시라 다르십니다. 질문의 핵심을 잘 피하시네요.” 아나운서의 말에 TV화면이 온통 웃음으로 차고 말았다. ‘내가 아무래도 괜한 말을 했어.’ 덕호는 TV를 껐다. 마음이 울적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철렁하는 가슴으로 덕호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지! 지금 TV를 보았어요.” 순희의 외마디였다. “순희야, 순희야!” “아버지 잘못했어요.” 

순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야. 아나운서가 솔직히 말하라니까 그렇게 말을 했을 뿐이지 왜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하겠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 정말 알 수가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어허! 용서라니! 네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덕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두 줄기 눈물이 뺨에 흘러 내렸다. 아내의 얼굴이 아물거렸다.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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