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다시 찾은 제2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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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잘 운영된다고 평가받는 인천공항(ICN)에서 비행기를 타고 LA로 향했다. 그러나 5년 만에 다시 찾은 제2의 고향인 LA공항의 모습은 아직도 규모만 크지 조금 전에 떠나온 인천공항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견주기 어려운 낙후된 공항이었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정확도가 좋다는 한국의 내비(Navigation)도 따라가기 어렵게 시시각각 눈부시게 발전하는 도시의 외관을 지닌 서울에서의 생활에 익어버린 나에게, 다시 보는 옛고향은 적어도 겉으로는 변화가 거의 없어 보였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지저분해지고 거리의 분위기도 조금은 더 살벌해진 느낌이 들었다. 비록 무자비한 데모가 수시로 벌어지는 서울이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다시 깔끔하게 정리되어 신선하게도 느껴졌던 서울 거리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정경이었다. 거기에 길거리에는 노숙자들이 설치한 텐트가 즐비하게 늘어선 정경을 보면서, 이곳이 과연 예전에 ‘천사의 도시(Los Angeles)라고 명명했던 곳이 맞는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모습은 모두 이해가 되는 현실이었다. 다만 내가 이제는 8순이 되어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겨우 5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정답게 느껴졌고, 가깝게 여겼던 친우들, 지금도 열심히 생활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젠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또한 설사 살아있더라도 노환으로 직접 상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정말 옛날 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고려 말기에 길재가 지었다는 시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찾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사실 나는 197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LA에서 25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청장년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50살을 바라보는 30년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제는 여생을 조국에서 보낼 심사로 생활하고 있다. 비록 자녀들을 포함해 가족들은 모두 미국에 있어도, 내 교회가 있고 친구들이 살고 있는 이곳 서울에서 생활하는 일에 무척 행복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미국에 사는 가족들과는 편리한 통신을 통해 소통함으로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이따금 용단을 내려 어려운 미국길에 나서는 것도 색다른 추억거리다.

그래도 역시 아직도 미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가운데도 자신의 위치 지키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현실적으로 세계를 이끌어 가는 리더십(Leadership)을 보면서,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여길 수 있었음은 큰 수확이었다.

또한 나의 8순잔치를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모여 조촐하게나마 치를 수 있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가족간의 화목과 사랑을 확인하는 뜨거운 감동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음은 큰 축복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여러 형태의 친구들은 그냥 반갑기만 했다. 비록 외모는 많이 늙고 수척했지만 한결같이 예전에 지녔던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었기에 ‘다시 미국에 와서 살 수 없는냐?’고 묻는 말에도 따뜻한 정이 묻어나온다. 사실 그 넓은 도시도 차를 타고 다니면, 아직도 예전의 추억이 그대로 묻어나오니, 아마 이런 점이 우리가 고향을 잊지 못하는 감정이리라. 몸은 피곤해도 제2의 고향을 찾은 마음은 다시 부풀어 오른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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