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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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일 (5)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대한신학교 10회 졸업생인 나는 재학 당시 학우회장을 지냈다. 학우회장 선거에서 나와 맞붙은 경쟁자는 후에 동신교회 장로가 된 이창식 학우였다. 그는 나보다 한두 살이 많고 체격도 좋았으며 얼굴도 잘생겼다. 게다가 함경도 출신으로 북쪽에서 이미 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를 추천한 친구들도 다 실력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총회 전도부에 있고, 평안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가 학우회장으로 당선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역감정, 학연 등에 얽매인 의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6.25 전쟁으로 인한 민족 대이동은 주택, 직업, 교육 등의 사회문제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측면에서 큰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 시기 교회들도 많은 피해를 받아 자체적인 수습이 급했기 때문에, 교회가 대사회 봉사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선교’와 ‘전도’, ‘교육’이라는 교회 사명의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5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는 전쟁으로 허약해진 교세의 재건과 신앙 부흥, 그리고 교회 개최를 목적으로 총회 전도부를 처음 상설했다. 그리고 제1군 사령부 군종부장으로 군 선교에 열중하고 있던 황금천 목사를 초대 총무로 선임했다. 불안정한 사회를 항한 ‘하나님의 선교’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새로운 움직임 안으로 나를 보내셨다. 

전도와 부흥의 길을 닦은 총회 전도부

1955년 10월, 믿음의 형이자 경동제일교회 담임이던 김성묵 목사로부터 황금천 목사가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상업학교 출신인 것을 알고 있던 김성묵 목사의 추천으로 황 목사가 나를 전도부 경리직원으로 불러 준 것이었다. 당시 총회 전도부에는 총무 황금천 목사 외에 장덕호 목사, 김영생 목사, 김낙영 목사가 간사로 있었는데, 회계 업무를 볼 직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1959년 9월 제44회 총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될 때까지 황 목사 밑에서 전도부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지 3년 만에 교단 총회에 입적하는 유례없는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5백 개 무교회 면에 교회를 세우다

내가 일하는 동안 전도부는 중요한 사업들을 많이 펼쳤다. 먼저 경상도 안동에서 열린 제39회 총회에서 교회 없는 면에 교회를 세우는 운동인 ‘5백 개 무교회 면 개척 전도사업’을 결의하고 구체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교회가 전국에 2천여 개밖에 없었다. 전도부에서 개척교회 교역자들에게 보내는 한 달 전도비는 전도사에게 5천 원, 목사에게 1만 원이던 때였다. 그런 상황이기에 ‘5백 교회 세우기 운동’은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각 지역에서 이 일에 참여한 목사들의 수고와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일개 경리직원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회 개척 현장에 자주 내려가 보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들을 통해 당시 많은 분들이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원노회에서 두 교회를 개척한 여운태 목사가 그때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산 증인이다. 이렇듯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제44회 총회 때까지 5년 동안 경기도 120교회, 전라북도 50교회를 비롯하여 전국 무교회 면에 목표한 5백 교회를 다 세우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전도를 향한 순수한 정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43회 총회록 참조) 6.25 전쟁 이후 교단 차원에서 실시한 전도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운동은 전쟁의 피해로 움츠러든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현재의 교회 성장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산업현장을 찾아가다

1957년 4월에는 총회 산업전도 위원회가 신설되었고, ‘5백개 무교회 면 개척 전도사업’과 병행해서 영등포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전도가 진행되었다. 당시 대규모 공장이 설립되면서 300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합숙하는 기숙사도 같이 생겼기 때문에 산업전도는 공장 기숙사를 기점으로 전도에 박차를 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영등포에 있던 ‘동아염직’과 ‘대한모방’이었다. 전도부에서는 이것이 근로자들을 전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강재구, 김재숙, 그리고 또 한 사람을 공장에 파송했다. 이들은 기숙사를 중심으로 여성근로자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 당시 전도부에서는 근로환경에 의해 주일에 교회에 나올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주일을 지키라고만 하지 말고, 다른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산업전도용 ‘쪽복음’ 2만 권, 산업전도용 찬송가 9천 권, 포스터 3천 매, 전도지 5만 매를 인쇄하여 찾아가는 전도에 열심을 다했다. 이러한 소식은 지방까지 전해져서, 당시 문경시멘트 공장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산업전도 활동을 하던 오철호 전도사가 산업전도 담당간사로 전도부에 오게 되었다. 그는 미군 부대에서 일했기 때문에 영어가 유창했고, 당시 일본 동경에 사무실을 두었던 동남아시아교회협의회 산업전도부 총무인 헨리 존스 목사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리고 후에 미국연합장로교회의 어라복 선교사도 산업전도 담당 선교동역자로 일하게 되었다. 1959년에는 기독청년 대학생들에게 기초훈련을 실시한 후 산업 현장에 파견해 현장 경험을 갖게 하고, 더불어 산업전도 지도자로 훈련시킨다는 목적으로 ‘영등포 산업전도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신학생이던 조지송, 인명진 전도사가 파견되었고, 이들은 후에 목사가 되어 한국산업선교의 큰 맥을 이루었다.

이단 종파에 맞서 올바른 신앙을 알리다

전도부에서 심혈을 기울인 또 다른 사입은 ‘이단 사이비 집회에서 교회를 보호하는 운동’이었다. 1955년 이후 기독교계 신흥종교인 천부교 창시자 박태선은 전도관과 신앙촌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전도운동을 벌이며 대도시에서 지방으로 영역을 확대해 전국적인 부흥집회를 열었다. 넓은 천막을 치고 집회를 하기 위해 천막 자재를 싣고 이동하는 트럭이 많았으니, 그 위협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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