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큰 별(星)이 지다… 춘원의 마지막 길 벽초 홍명희와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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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인 춘원이 ‘위선자’로 비쳤다니….

아버님이 말하는 그런 고상한 사상은 인간으로는 가질 수 없다는 거죠. 어머니는 강한 성격이었고 가족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지요. 자신이 운영하는 산후원(산부인과병원)에서 일을 잘못하고 말 안 듣는 의사나 간호사의 뺨을 때리기도 했어요. 소설의 주인공이 돼도 좋을 캐릭터지요. 어머니는 흥미로운 일생을 사셨어요.

– 집안에서 부부의 역학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아버님이 꼼짝 못했어요(웃음). 아버님이 쓴 아내의 설교라는 시가 있어요. 화자(話者)를 어머니로 한 것이지요.

‘당신은 악인 나도 악인/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악인이라고 인정하는데, 당신은 선인인 척해 남들로부터 존경 받는다/ 나는 손이 다 닳도록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당신은 날 위해 무얼 했소/ 그러니 나를 이해라도 해주는 남편이라도 돼 주소서.’

– 말하자면 아내의 잔소리군요.

사실 아버님은 어머니에게 의지해 살았지요. 아버님이 신장과 허파를 하나씩 잘라내고 생사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곁에서 어머니가 돌봐 주셨어요.

아버님의 작품 중 ‘사랑’은 침상에 누워 구술해서 썼다고 합니다.(춘원과 허영숙은 도쿄 유학 시절 만났다. 춘원에게는 이미 중매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 춘원은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뒤 상하이로 건너갔다. 거기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자 허영숙이 중국까지 춘원을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 집이 부자였어요. 집 안 금고를 뜯어 돈을 챙기고 ‘제 몫의 상속을 포기합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나왔다고 해요.

여자 혼자서 열차를 타고 찾아간 겁니다. 어머니는 갖고 온 돈으로 상하이에서 산후원을 열고는 아버님과 살림을 할 생각이었지요.

– 상해 임정에서는 ‘허영숙이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고 이광수를 귀국시켜 타락 시켰다’는 말이 퍼졌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상하이의 호화로운 호텔에서 아버지와 하룻밤을 지냈대요. 이 소문이 나자 임시정부에서는 ‘일제 앞잡이 허영숙을 잡아라’는 체포령이 떨어졌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아버님에게 허영숙을 보내고 자네는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유서를 남기고 양자강에 몸을 던지려고 했대요.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물이 더러워서’ 못했다는 거에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랬겠지요(웃음).

허영숙이 춘원을 귀국시켰다는 비난은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그때 이미 춘원 자신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상해 임정에서 2년을 지냈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국내 상황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춘원은 상해 임정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춘원은 친일파의 길로 가지 않았겠지요?

성삼문과 안중근 의사는 독야청청하신 분이고 아버님은 정이 많은 예술가였어요. (적극 항일에서 현실 타협으로의 노선 변화를 보여준 춘원의 첫 번째 작품이 ‘민족개조론’이었다. 열등한 민족성으로는 당장 독립하는 것이 시기상조이니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글이 발표된 뒤 청년들이 집으로 몰려와 ‘춘원 나와라!’고 외쳤대요. 한 청년은 칼을 들고 있었답니다.

어머니는 벌벌 떠는데 아버님은 뚜벅뚜벅 걸어 나가 청년들을 집 안으로 불러 들였어요. 대화를 나눈 뒤 청년들이 얼마간 설득돼 그냥 돌아갔대요.

– 춘원이 적극적인 친일로 갔을 때 어머니는 뭐라고 했나요?

수양동우회 사건에 41명이 연루됐어요. 자신은 친일 누명을 쓰더라도 아들의 유죄를 막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당신 미쳤느냐, 이게 무슨 짓이냐’며 울었답니다. 아버님도 울면서 ‘나는 이 길을 가야겠다’고 했대요. 아버님은 일제에 계속 저항하면 한글이 폐지되고 민족도 말살된다고 봤어요. 과대망상이라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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