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간신히 은신… 명맥 이어 온 기독교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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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난민 사역과 비밀 모임

처음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 선교는 불가능하였기에, 하나님의 역사는 변방에서 시작되었다. 기적적으로 2차 세계 대전 말기인 냉전 시대라 불리는 1940-5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파키스탄과 인도로부터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선 근처(Quetta, Tank, Peshawar, Bannu)에 많은 선교병원이 세워져 파키스탄 현지인 및 아프간인을 돌보게 된다. 크리스천 교수들이 교수사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온다. Hafizullah는 헤랏(Herat)에 있는 맹인학교의 크리스천 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이층 창문에서 누군가에 떠밀려 사망하였다. 그는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예수와 face to face 할 것을 믿었다.

1960년대에 IAM(International Assistant Mission)이 태동하게 된다. 대부분의 크리스천 사역자들이 IAM을 통해 들어오게 된다. 개인 회심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하였다. 1969년  카불 대학의 학생이었던 Hussein은 꾸란에 있는 예수의 이야기를 읽고는 개종하여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1969년 3월 17일 무슬림 과격분자들에 의해 독살당하고 만다. 

19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 첫 교회가 건축된다.(담임 Woodberry 목사) A Zia Noodsrat(맹인 신자)을 포함한 아프간 신자들이 생긴다. 하지만 1988년 이슬람 과격분자에 의해 순교하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번역하고 노래와 시를 작사한다. 

1973년 7월 17일에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교회가 파괴되고 바로 그날 밤 아프간 정부가 전복된다. 구소련이 침공한 1979년 12월 15일부터 철수한 1989년 2월 15일 10년 동안 당시 선교사들은 주로 난민 사역(파키스탄의 페샤오르와 이란 국경지역)에 주력한다. 그 후 무자헤딘 시절에도 역시 난민 사역이 주종을 이룬다.

1980년대에도 난민 사역이 주를 이룬다. 1980년 Gorden Magney가 주축이 되어 파키스탄Peshawar에 SERVE를 창설되고, 19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많은 난민이 파키스탄과 인도, 이란지역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로써 난민들에게 직접적인 복음 제시가 가능했다. 이때에 Peshawar 와 Quetta, Islamabad와 New Dehli 등지에서 아프간 기독공동체가 형성되기 이르렀다.      

1990년대의 강력한 이슬람 치하에서 공산주의를 신봉했던 사람들이 난민으로 아프간을 등지게 된다. 이때 공산주의를 신봉했던 난민들(무신론자)의 급격한 회심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슬림 난민보다 회심에 훨씬 적극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 당시에 아프가니스탄 크리스천 공동체가 국외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천명하게 된다. 이때 활동한 단체들이 Afghanistan Christian Fellowship (네덜란드), Hope for Hazarah (뉴델리와 미국), CNFA(호주)이다.

2001년 9.11 테러사태 이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기독교를 접한 많은 난민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부터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아직 없다. 현재 아프간의 크리스천 공동체는 아직 미약하지만, 현재 카불에는 탈레반이 재집권한 상황에서도 수십 개의 비밀 모임이 있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성서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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