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13)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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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서 하나님 찬양하며 예배, 감격의 눈물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그 후 김인식 박사는 미국 남장로교 아시아태평양담당 선교부 총무를 시작으로 남북장로교 통합 후 35년 3개월 봉직하면서 나를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입학은 결정되었지만, 9월 총회를 준비해야 했고 또 퇴직금으로 여비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부득이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난 11월이 되어서야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유학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얼스킨 신학교를 방문한 한경직 목사와의 만남이다. 1968년 미국장로교(남)총회 세계선교부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대표로 한경직 목사를 Mission to USA 프로그램에 초청했다. 한경직 목사는 학장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 김인식 박사와 나를 받아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고, “총회에서 일한 정봉덕을 알고 있냐”는 학장의 물음에 “몇 번 봤었다”고 대답했다. 민망해지는 상황이 생길까 싶어 마음을 써 준 것이다. 그 짧은 만남이 유독 내 가슴에 오래 남아 있는 이유는, 그의 이러한 배려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유학생활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미국에 간 지 일 년이 안 되어 막내가 태어난 것이다. 2남 2녀의 아버지가 되었기에 책임감이 더 커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내 혼자서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 살림과 내 학비까지 감당하게 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김응율 목사와 박영희 목사에게서 시카고로 오면 가족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고 일과 공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1969년 일스킨 신학교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는 시카고로 가서 노스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에 등록을 했다. 하지만 대한신학교와 단국대학교의 학점이 부족하여 4년을 더 공부해야 할 형편이었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아 결국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한국행 비행기 표를 사 놓고 귀국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서울에서 신후식 목사와 한완석 목사, 이창노 장로가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열리는 장로교회 대표 모임에 참석하는 길에 시카고에 들러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뉴욕과 파리, 로마, 아테네,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나이로비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고, 그것은 매우 좋은 기회였다. 나는 서울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1970년 7월 뜻하지 않게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다.

두 번의 성지순례

이스라엘 관광산업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았고,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도 맺어지지 않은 때였기에 관광안내도 현지인 택시 기사가 담당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자가용 한 대를 전세 내서 운전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전과 통곡의 벽, 베들레헴 말구유, 골고다, 감람산, 나사로의 무덤, 가버나움, 팔복 동산, 갈릴리 바다, 여리고 사해, 가나안 잔칫집 등을 순방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성지순례였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1998년 2월 2일에 나는 두 번째로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다. 봉직 중이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염천교회의 창립 50주년 기념사업 계획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1997년 말 IMF 경제위기로 인해 국내 경제가 몹시 어려운 때였기에 여러 모로 분위기가 좋지 않아 많이 망설였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가 주최가 되어 성지순례를 한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희년사업으로 수년 전부터 계획됐던 일이라 진행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염천교회 당회장 박위근 목사를 포함해 21명이 11박 12일 일정으로 성지순례의 길에 나섰다. 이집트의 카이로와 룩소, 요르단과 이스라엘, 로마 등을 둘러보면서 첫 성지순례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큰 감동을 경험했고 많은 자극을 받았다. 첫 번째보다 방문 범위도 넓었고, 박위근 목사의 지도로 이랜드 여행사의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지순례를 통한 신앙의 깨달음과 감동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시내산 등정에서 얻은 강렬한 느낌은 단연 최고였다. 시내산 정상과 그 주변의 황홀한 풍광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하사하신 성산의 위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곳에서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때, 명명할 수 없는 큰 감격에 우리는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문득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참석했던 부흥사경회 때의 말씀이 떠올랐다. 1953년 1군 사령부 군종부 선임하사관으로 복무할 때, 서울 창신교회 김세진 목사가 원주제일교회로 오셔서 주신 말씀이었다. 김 목사는 먼저 회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한 것은 애굽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시며 회개와 순종을 강조하셨다. 수십 년 전에 들었던 말씀이 그 광야 순례길에서 떠올랐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보았지만, 약속의 자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 묻히고 말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해 나가고 있는 나의 마지막 자리는 어디일지, 또 오늘 나의 믿음은 순종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새삼 되물어보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북한선교·군선교를 향한 마음

귀국 후 나는 북한선교나 군선교 기관에서 일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곳이 척박한 땅이 되어가는 것이 마음 아팠고, 군대는 내 인생을 바꾼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먼저 북한선교위원회를 조직(회장 한경직 목사, 부회장 최중해 목사, 회계 정세빈 장로, 서기 정봉덕)하였고, 6.25전쟁 20돌을 기념하여 1971년 가을에는 ‘눌린 자에게 자유를 기원하는 북한자유화 촉진 예배’를 영락교회에서 4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드렸다. 예배 인도는 한경직 목사가, 설교는 평북지사였던 백영렵 목사가 했다. 백 목사는 20년 세월 동안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려온 실향민들을 위로하면서 ‘다니엘을 본받아 고향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조국의 통일을 위해 간구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강인덕 선생이 북한 실정을, 백낙준 박사가 북한자유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선교위원회에서는 ‘기쁜소리센터’를 설립하여 철원 전방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 십자가에 확성기를 설치하여 복음을 북쪽으로 전파하여 그 땅이 변화되기를 기원했다. 1972년 6월 20일 목사, 장로 등 81명이 현장을 방문하여 기념예배를 드렸다.

또한 나는 총회 군선교부 서기로서 군목부 총무로 온태원 목사를 영입하고 사업을 후원하기도 했다.

북한선교에 대한 내 뜨거운 마음은 식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세 차례나 북한 땅을 밟을 기회를 허락하셨다. 첫 번째는 2002년 2월 23일 총회 선교통일위원회의 지원 하에 평양에 수경재배 센터를 만들었을 때 준공식 참석을 위한 방문이었다. 두 번째는 2002년 10월 15일~19일, 한국 월드비전의 북한 담당이던 박창빈 목사가 북한에 씨감자 재배법을 소개하기 위해 갔을 때였다. 박 목사와 동행한 나는 고향 정주를 방문하는 등 매우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건물들은 바뀌었지만 정주읍에서 내 고향 마을로 가는 길은 그대로였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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