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춘원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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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로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식민지 치하의 격동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이처럼 엄청난 업적을 남긴 이광수의 생애는 정말 파란만장하다. 문학비평가이며 민족운동가로서도 그는 실로 커다란 업적을 이룩했다. 이광수의 곡절 많은 생애를 몇 단계로 그는 이렇게 나누고 있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던 가난한 어린 시절, 일본 동경의 중학시절과 오산학교의 교원 시절 및 유랑의 길, 일본 와세다 대학의 유학과 ‘무정’의 신문 연재와 부인 허영숙과의 만남, 그리고 그는 2.8 독립선언, 상해의 독립운동시대와 민족개조론의 회오리, 도산 안창호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절 및 수양동우회 사건, 창씨개명과 민족보존의 일념으로 친일행위, 반민특위와 남양주의 사릉(思陵)에서의 자전 소설 집필과 6.25 전쟁 등으로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춘원은 60세가 되기 전 서울에서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평양 근교에서 그의 생을 마쳤다.

구 교수는 ‘이광수가 나무하다가 손을 베어 울고 있을 때에, 옷고름을 뜯어 짜매 주며 위로하던 중년의 부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산기슭에서 시름에 빠져 있을 때에 서접주를 만나지 않았으며, 예옥을 만나 박대령 집을 떠나지 않았으면, 백혜순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김성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병원에서 허영숙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해에서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건강한 몸이었더라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자신의 생애를 타의에 의해 마치고 만다’라고 그의 생애를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우연히 만나 가슴을 불태운 실단이, 예옥이, 난수, 백혜숙, 허영숙, 나혜석, 모윤숙 등의 여인들은 어디로 다 가버리고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선 이 나라에 이광수는 10권의 전집으로 문학의 공간을 채워주는 문학의 커다란 금자탑을 이루었다’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구인환 교수는 이광수 스스로가 글 쓰는 사람(文士)이기보다 논객이기를 좋아 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이광수의 사상을 분석하여 3학년 지리시간 이후 전 지구를 밟고 싶었던 방랑의식,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던 자아의식, 그의 개성과 개성에서 온 반항의식, 왜 사는가로 고민하는 종교의식 등으로 나누었다.

그는 이러한 의식들은 사실상 그의 파란 많은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이다. 특히 종교의식에서 그가 천도교를 거쳐 기독교를 지나,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음을 지적하여 뒤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구 교수는 그의 작가 의식을 가리켜 구질서를 부정하는 논의, 민족주의의 문제, 창작을 하는 문인이라기보다 논객을 자처하여 창작 자체를 한가로운 시기의 기교(技巧)라고 지적한다. 그의 문학사상을 가리켜 성서의 문학, 공리주의 문학, 항구적 문학의 보편성 등을 들었다.

구 교수는 이처럼 위대한 춘원 이광수의 생애와 문학적인 업적을 회고하면서 아직도 숨어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해야 하는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하였다. 특히 이광수가 조선일보에 사설, 횡설수설, 논설, 소설 등 사설(四說)을 썼다고 말한 점을 지적한다.

사실 이광수는 시인이었고 수필가였고 소설가였고, 동시에 논책이었다. 그가 남긴 10권의 전집이나 춘원 문학사진 등의 많은 업적으로 보아 50분의 강의로서는 너무 부족하여 한 학기의 강의가 더 이루어져야 하고, 또 아울러 기념관도 세워져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오늘의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구 교수는 결론적으로 격동의 시대에 대응하면서 방대한 문학적 숲을 창조한 춘원 이광수와 그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더욱 고조되고 활발해질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뒤를 이어 춘원의 막내 따님이며 ‘그리운 아버님 춘원(우신사, 1955)’의 저자이기도 한 이정화 교수의 아버지에 대한 짧은 회고가 있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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