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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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이 행복을 아이들에게 주자 ⑤

새문안교회 부임, 교회 교육 혁신 앞장

몸 돌보지 않고 열심히 최선 다해

아프거나 힘들어도 표시내지 않아

‘성직자의 귀감, 양심의 거울’ 상기

그 한 알 값이 그때 돈으로 일금 1,000원! 그것도 예약금을 맡겨 놓고, 서로 빼앗듯이 경쟁적으로 사 가는 호경기였다. 불광동 부화장에 가서 메추라기를 부화시켜 팔기도 하고 알로도 팔아 번 돈이 50만 원이나 되었다. 그때 50만 원이라면 거금이었다. 20평 짜리 후생주택이 100만 원에 나가던 시절이니까.

황 목사는 처음에 김 여사가 하는 일을 아주 호기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김 여사가 메추라기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에 재미가 나서 많이 기를 계획을 세웠더니 황 목사는 한 마디 말로 말리는 것이었다.

“다섯 쌍 이상은 기르지 마시오.”

그래 할 수 없이 다섯 쌍으로 제한하고, 알을 낳는 대로 자꾸 팔기만 했다.

나중에는 그 다섯 쌍마저 없애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여보, 암만해도 이 일이 정상은 아닌 것 같소.”

계속 야단을 치기에 김 여사는 아쉬운 것을 무릅쓰고 한 마리 남김없이 모조리 다 팔아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1주일이나 되었을까? 메추라기와 알 값이 폭락되었다. 그렇게 비싸게 판매되던 것이 거저 준다고 해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아주 폭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황 목사는 열심히 교회봉사를 했다.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부목사의 집이라 해서 교인들이 선물을 가져오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즐겨 고아들과 함께 지내고 또 고아원 생활을 오래 한 그로서 선물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가 받아서는 안 될 것을 받는 것처럼 죄스러워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남의 것을 받아 먹는 사람이 되었지?”

크리스챤 신문 및 대광학교

황광은 목사가 새문안교회로 부임하던 때에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고 엄요섭 목사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 영락교회에 소개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영락교회의 모 장로님은 크게 환영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당회의 절차를 거쳐야 하니 잠시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새문안교회의 강신명 목사는 “당장 새문안교회로 오라. 절차는 차차 거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해서 새문안교회에 가게 되었다.

새문안교회에 부임한 황 목사는 한태동 박사 등과 힘을 합쳐 교회 교육을 혁신했다. 우선 교육관에 교실을 만들어 분반 공부를 차분한 분위기에서 할 수 있게 했다. 그는 교회 교육을 하면서도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가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자기 몸이 아프거나 고되더라도 그것을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태동 박사의 제안으로 함께 점심을 먹은 후 당시 세종로 네거리에 있던 국제극장에 영화 구경을 가게 됐다. 내용이 재미있고 심각해서 일행은 그 영화에 심취되어 있었는데, 맨 옆 자리에 앉았던 황광은 목사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영화가 끝난 후 일행은 황 목사를 비난했다. 아무리 바쁘기로서니 말이나 하고 사라져야지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느냐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 황 목사는 지병인 심장병이 도져서 심한 통증이 왔다. 그는 친구들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통로를 기어 병원으로 가서 입원 치료를 받은 것이다.

황광은 목사가 새문안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던 때 새문안교회의 교인이었던 민창식 씨는 캐나다 밴쿠버에 이민가 살면서 근 30년 전의 황광은 목사를 다음과 같이 상기하고 있다. 다음 글은 그가 김유선 여사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나의 평생에 걸친 교회 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목회자상으로 항상 황광은 목사님을 꼽고 있습니다. 그것은 박재훈 박사로부터 때때로 황광은 목사님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박 박사님은 지금도 황 목사님께서 먼저 가신 데 대해 못내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잊을 수 없는 황 목사님의 영상을 그리면서 나름대로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쯤 뒤에 밴쿠버에 살고 계시는 황정은 장로님으로부터 ‘인간 황광은’이라는 책자를 받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꼬박 사흘 동안 밤새워 읽으면서 눈물도 많이 흘리며 고인을 못내 그리워했습니다.

세월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황 목사님께서 작고한 소설가 이종환 씨 등과 서울교회에서 자취생활을 하실 때인 어느 크리스마스날 새문안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찾아가 만나뵈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황 목사님이 방글방글 웃으시던 일과, 이종환 씨가 경성신사 자리 뒤편 돌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캐나다를 다녀가신 서예가 김기승(金基昇) 씨와도 황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말하기를 “황광은 목사는 성자로서 한국에서는 추앙하고 있다”고 하시며, ‘특별한 목회자’라는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한국을 떠나와 여러 곳에서 살았는데, 미안하게도 조국에 대한 사랑은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새문안교회의 교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지금도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문안의 푸른 풀밭에서 양들을 돌보신 많은 교역자 중 원한경 선교사님 일가와 차재명(車載明) 목사님 그리고 황광은 목사님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분들이며 특히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요새 일부 부흥사라는 목사님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황광은 목사님과 같으신 분이 교역자로 계셨기에 같은 교역자인 그들을 비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 목사님은 진정 성직자의 귀감이요 양심의 거울이었습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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