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고래(whale)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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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맥이 끊기고 연어가 없어지고 유능한 젊은 청년 지도자들의 씨를 말리는 조선총독부의 말살 정책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도쿠도미의 살생부 블랙리스트’는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악랄한 일본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서 글을 제일 잘 쓰는 춘원을 포섭, 회유하여 식민지화의 홍보 첨병으로 이용할 때, 자신들이 얻는 효과는 매우 크다고 보고, 충분한 반대급부를 주면서 춘원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춘원은 자신이 이용당하는 것만큼, 일본에 많은 것을 요구하며 그들의 압박이 보다 느슨해지기를 바랐습니다. 일종의 춘원식 ‘저항’운동이었습니다.”

막내 딸은 오늘도 이렇게 항변한다.

“아버지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 순수한 아버지 애국정신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도 아버지는 최후 진술에서 본인의 그 당시 심경을 솔직히 피력했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아버지를 정신병자로 취급했습니다. ‘과대망상적 자아의식의 미친 사람’이라고 악평을 했답니다. 내가 곧 조선이고 내가 아니면 조선이 망하고 나만이 조선을 구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증 환자로 몰아 붙였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순수한 애국으로 희생한 진짜 애국자로 보건, 아니건 하는 것은, 아버지 말대로 먼 훗날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 했지만,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언젠가는 국민들이 아버지의 진심을 올바르게 심판을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막내 딸 이정화 교수는 아버지 춘원에 대해, 계속 말을 이어간다.

“1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아버지를 용서 못하고 도마위에 올려 놓고 난도질을 해대는 것은 너무나 서럽습니다. 친일을 하기 전에 쓴, 아버지 작품마저도 서럽게 박해를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58년의 짧은 우리 아버지 생애는 정말 불쌍합니다. 일제때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도산 안창호 선생과 더불어 잡아다가 감옥살이를 시키며 심한 고문까지 했습니다. 해방되자 다시 이 나라는 아버지를 체포,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고 또 옥고를 치르게 했습니다. 6.25가 터지자 북한 공산군은 또 반동이라고 병든 아버지를 잡아 갔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야말로 세상의 친한 동네북이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아버지가 너무나 불쌍합니다. 이제는 이 나라가 우리 아버지를 풀어주고 용서해 줘야 합니다. 막내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하라면 조국에 얼마든지 사과하겠습니다. 언제까지 잘못을 빌면서 살아야 합니까? 어디 속 시원히 답변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빕니다.”

몇 차례에 걸친, ‘아버지 춘원’이라는 강연에서 합장하면서 그녀는 늘 울면서 하소연했다.

이정화 교수는 오늘도 팔순의 불편한 몸이지만, 희망을 잃지않고 먼 이국땅에서, 조국 대한민국의 하늘이 맑아지는 것을 기대하며, 그녀의 가느다란 고래의 꿈을 계속 꾸고 있다. 이 꿈이 꼭 이뤄지기를 기대한다.<끝>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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