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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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큔, 기독교인의 신앙 양심으로 신사 참배 거부

평안북도 지역 대표, 한국인 지도자 역할 부여 받음

매큔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105인 사건’의 주동자로 연루됐고 이후 3·1 독립운동 때 만세운동 학생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1921년 미국으로 추방됐다. 미국 휴런 대학교 학장으로 있을 때도 한국 유학생들을 돕다가, 1928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교장으로 청빙되어 다시 한국에 왔다. 매큔은 숭실전문학교장 재임 시절, 기독교인의 신앙 양심으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 이 일로 그는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을 파면당하고 3개월 뒤 다시 한국에 왔다. 매큔은 숭실전문학교장 재임 시절, 기독교인의 신앙 양심으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 이 일로 그는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을 파면당하고 3개월 뒤 다시 미국으로 추방됐다. 그리고 194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그에게 건국 공로 훈장과 문화 훈장을 수여했다. 

이같이 평북 선천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부를 통한 지역 복음전파의 중심지였을뿐 아니라, 교육 및 의료 선교(1905년 미동병원 설립)로 일찍부터 서양 문물과 신교육을 받아들임으로 애국자와 선각자를 많이 배출해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온상지가 됐다. 선천은 한국의 주변부에 불과했으나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함으로 한국 근대화의 새로운 요람,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가 됐다. 

독노회 산하에서 북평안 대리회는 평안북도 지역 전체를 담당하며 크게 세 가지 방면에서 주요 사업을 이룩했다. 다른 대리회도 모두 같은 사업을 주요 사업으로 전개했으나, 다른 대리회와 비교했을 때 유독 평북지역에서 그 열매가 두드러졌다. 첫째, 그전부터 꾸준히 해온 대로 교회를 설립하고 돌보는 일이었다. 우선 이런 일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평안북도 지역에서 활발한 전도 활동을 벌였던 양전백이 선택됐다. 이는 독노회 설립의 주역인 한국 장로회 최초 일곱 목사의 부임지를 결정함으로 이루어졌다. 1907년 9월 19일 노회에서는 정사 위원 박정찬의 보고를 통해 새로 안수받은 일곱 목사의 부임지를 결정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보내되 월급은 전도국에서 지출하기로 했고, 방기창 목사는 용강, 제재, 주달 교회의 전도 목사로 임명했고, 한석진 목사는 평양 정천, 미림리천 교회의 전도목사, 송인서 목사는 증산, 한천, 외서창, 영유, 허리몰 교회의 전도목사, 길선주 목사는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로 임명했고, 양전백 목사는 선천, 정주, 박천 등지에서 위대모 목사와 같이 전도목사로 일하도록 했고, 서경조 목사는 장연, 옹진 등지에서 사우어 목사와 같이 전도목사로 일하도록 임명했다. 전도목사 6명의 월급은 그 당회 위원에게 위임해 지출하게 했다. 

이 결정에 따라 양전백은 평안북도 지역을 대표하는 목사로, 선천을 중심으로 평안북도 전체를 이끄는 한국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듬해 작성된 정사 위원 보고서는 양전백이 선천뿐 아니라 평안북도 전체를 담당하는 목사였음을 말해 준다. 1908년 9월 10일 노회 정사 위원 보고에는 양전백 목사를 선천읍 예식목사로 정했다. 

이후 북평안 대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하나의 교회를 중심으로 예닐곱 교회를 돌봐야 했다. 그리고 목사 숫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교회를 설립하고 돌보는 일에서 노회 차원의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게 됐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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